그는 죽어가는 수 천명의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스페인의 잡지 El Mundo에 실린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의 기혼 가능 회원(Super numerary)인 페르민에 대한 기사입니다. 페르민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라구나 호스피스 보호 센터에서 20년 넘게 자원봉사자로 일을 했으며 지난 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삶을 마감했습니다.

Opus Dei - 그는 죽어가는 수 천명의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페르민씨는20년 넘게 마드리드에 있는 라구나 호스피스 보호 센터에서 봉사했습니다. 페르민씨는 그곳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원봉사자였습니다. 페르민씨의 봉사는 삶이 거의 남지 않는 암 말기 질환 환자들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페르민씨는 수 천명의 환자들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페르민씨의 일화는 이별의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기쁨과 평화를 가져 다 주는 기쁨 가득 찬 이야기입니다. 페르민씨는 알츠하이머 말기환자들과도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잊을지라도 페르민씨는 그곳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페르민씨는 스페인의 하엔 지방에서 82년 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탄생 얼마 뒤 그의 가족은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마드리드로 이사했습니다. 페르민씨에게는 5명의 자녀와 13명의 손자, 손녀가 있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곧 태어날 예정이었습니다.) 페르민씨는 회계사로 일을 했으며, 2달 전, 그의 아내 마리아 이사벨이 심부전으로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페르민씨도 지난 주 월요일 코로나19로 인하여 그의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페르민씨의 딸 루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지난 2년 어머니께서 편찮으셨던 기간을 제외하고 2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자원봉사자로서 봉사해 오셨습니다. 지난 1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는 그간 하지 못하셨던 봉사를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호스피스에서 노인들을 도와드리면서 당신의 남은 삶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2주 전, 페르민의 딸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 아버지를 뵈러 갔습니다. 페르민은 앉아 있지도 못하고 기력이 완전히 없었습니다. 평소에 그녀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지쳐 있으셨고 37도의 체온에 기침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집에 더 머무르기로 결정했고 밤새 아버지와 함께 있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열이 거의 38도에 육박했고, 다음 날 아침 6시 아버지께서 호흡이 힘들어지셔서 우리는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아버지는 오전 내내 중환자실에 계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면역력이 없는 모습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매우 떨리는 구나’ 하고 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셨습니다. 의료진은 아버지가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으며 폐렴이 진행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책 중에 팀 오브라이언이 쓴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은 베트남의 알파 회사의 미군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 물건들은 병따개, 주머니 칼, 성냥, 껌, 담배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페르민의 장녀가 그 토요일에 가져온 것들이 있습니다. 1. 핸드폰 충전기, 2. 간식, 3. 자켓, 4. 독서용 안경, 5. 그리고 당연히, 성경.

페르민의 친구이자 라구나 호스피스 보호 센터의 또 다른 자원봉사자인 안나 마리아는 매일 오후 2시에 보호 센터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페르민은 언제나 날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쩔 때는 조금 더 오래 있었어요. 페르민이 자원봉사자로 일한 이후로 그는 다른 자원봉사자들에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오래 일했기 때문이에요. 페르민은 매우 친절했습니다. 그의 눈은 그가 돌보는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페르민은 라구나 호스피스 보호 센터의 초대 봉사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오늘날 그곳의 자원봉사자는 120명이 넘어요.”

페르민의 좋은 친구이자 또 다른 자원봉사자인 앙헬 페레즈는 시각장애인들을 만나러 차로 이동했던 경험을 말합니다. 페르민씨가 그 방을 잠시 떠났을 때, 그 맹인은 앙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페르민씨가 저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분이신지 표현하기 힘드네요. 페르민씨가 떠날 때, 저는 그분이 다시 돌아올 날을 계산하고 있었어요.“ 페르민씨가 다시 오자, 앙헬은 그에게 왜 그 맹인이 그렇게 페르민씨에게 고마움을 느끼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페르민씨는

대답했습니다."제가 특별히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산책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커피를 함께 마시며, 병원과 은행에도 갈 수 있게 도와준 것 뿐입니다. 자식들이 오지 않으니, 제가 함께 해드릴 뿐입니다.”

페르민이 병원에 입원한지 이틀 동안, 의사들은 페르민의 증세가 호전되고 있고 전망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페르민씨가 입원 한 이틀동안 의사들이 그의 증세가 호전될거라 기대했지만,

그의 딸이 말 “화요일에 제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을 때 받지 못하셨어요. 핸드폰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계셨어요.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휴대 전화를 들 힘도 없으셨습니다. 의사들은 페르민씨에 대한 산소공급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의사는 페르민씨의 상태가 더 악화되었고 심각한 쌍방 폐렴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페르민씨는 그로부터 5일 간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농담을 많이 하곤 하셨습니다. 페르민의 자녀들은 여름 방학 동안 해변에서 캠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이 너무 많아서 자동차에 모두 타는 것이 힘들어, 에어컨 없이 자동차 여행을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때 영락없는 스페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방학에 낚시를 하러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언제나 미소를 짓고 계셨어요. 심지어 낚싯줄이 헝클어질 때 조차도 말이에요.”

“어머니께서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단 한 가지 주님께 청할 거란다.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되기를….’ 그리고 아버지는 결코 하느님을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화요일 그의 아내가 묻힌 곳 옆에 페르민씨도 묻혔습니다. 브루셀에 살고 있는 그의 아들 카를로스, 발렌시아에 살고 있는 그의 아들 페르민 ,더 멀리 루이지애나 주에 살고 있는 그녀의 딸 팔로마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딸 루르드, 이사벨과 그녀의 남편인 호세 알베르토, 페르민의 친한 친구인 히카르도만 페르민 씨의 장례식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4명은 서로 2m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고 포옹 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친척들과 친구들은 페르디씨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다른 곳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루르드가 병원에서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빠. 많이 사랑해요.”

수 천명의 병자들의 임종을 함께 했던 그는 딸에게 두 마디로 대답했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