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문을 열어 줍니다”. 영화감독과 주교가 나누는 신앙과 연기, 일의 성화 이야기

영화감독 마쓰모토 준페이와 사카이 도시히로 주교가 용서와 하느님과의 우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배우의 연기가 어떻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길이 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용서는 문을 열어 줍니다”. 영화감독과 주교가 나누는 신앙과 연기, 일의 성화 이야기

영화감독 마쓰모토 준페이와 사카이 도시히로 주교가 용서와 하느님과의 우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배우의 연기가 어떻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길이 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2026년 7월 1일, 도쿄의 후지미 아카데미에서 영화감독 마쓰모토 준페이와 오사카·다카마쓰 대교구 보좌주교 사카이 도시히로 주교의 공개 대담이 열렸습니다. 영화와 신앙생활에 관해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 가운데 일부를 소개합니다.

사카이 주교는 가톨릭 커뮤니케이션·미디어 단체인 시그니스 일본(SIGNIS Japan)의 지도 주교입니다. 마쓰모토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영화 《어머니의 손길》(A Mother’s Touch, 2022)로 일본 가톨릭 영화상과 시그니스 일본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최근 작품인 《나가사키: 섬광의 그늘에서》(Nagasaki: In the Shadow of the Flash, 2025) 역시 시그니스 일본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마쓰모토 감독은 나가사키의 세이도 학원 중학교에 다닐 때 오푸스데이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일을 성화하라는 호세마리아 성인의 가르침이 자신의 영화 연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영화 제작을 영적 생활과 별개의 일로 여기지 않고, 갈등과 의심, 보람을 느끼는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작품 하나하나에 쏟아붓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일 자체가 하나의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일상의 일을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이러한 지향은 아래에 소개하는 사카이 주교와의 대담에도 이어집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용서와 연기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로 나아갑니다.

마쓰모토 감독: 《나가사키: 섬광의 그늘에서》는 원자폭탄을 다룬 영화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용서라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각본에 넣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여러 교육기관에서 이 영화를 상영해 주셨습니다. 그중 한 상영회에서 어떤 학생이 아주 어려운 질문을 했는데, 저는 만족스러운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 우리는 용서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오늘 대화 중에도 계속해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으로 어느 정도 답이 되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왜 용서해야 하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가령 누군가의 부모님이 살해당했다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이 복수하려 한다면 잘못된 일일까요?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저 혼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주교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사카이 주교: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므로, 우리는 이미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무엇입니다. “나는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또는 “나는 그 일을 용서할 수 없다.”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각자 자기 안에서 이 문제와 씨름하기 때문에 용서를 일반론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일반적인 설명은 당사자의 마음에 가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릅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로 답이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아이가 “왜 용서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제가 답한다면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 용서는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에 사로잡힌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용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감정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거나 용서하려 하지 않는 마음에 계속 묶여 있게 됩니다.

물론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도 있습니다. 《나가사키: 섬광의 그늘에서》에는 기관총 공격으로 어머니를 잃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인물은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고,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 위에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까지 더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서 풀려나는 기쁨과 자유는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이 짊어지시고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벌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짊어질 필요가 없는 짐입니다. 그런데 오직 용서해야만 내려놓을 수 있는 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용서를 참으로 놀라운 무엇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 각자는 이미 수없이 용서받았습니다. 누구나, 특히 부모님에게서 용서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용서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찾아보고 알아차리는 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았으니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용서해 준 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우리의 잘못을 눈감아 주고 용서해 준 일이 많습니다.

서로 용서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 자신부터 용서를 시작해야 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네가 그런 세상을 바란다면, 네가 먼저 용서해 보면 어떨까?”

세상의 형편을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갈등이 계속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상황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묶고 있는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는 악순환을 끊고 싶다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 고리를 끊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악순환은 우리에게서 끝납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라 오랫동안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옆에는 “왜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도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질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쓰모토 감독: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새 계명, 곧 사랑의 계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답을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용서가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정말로 답일 수 있겠습니다. 저도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양심의 본성 자체를 거스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이 잘못인 까닭은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토대를 거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자유로워지기 위해 용서한다는 주교님의 첫 번째 말씀과 매우 가까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카이 주교: 네,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 신학에서도 아마 같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양심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자연법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왜 용서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아이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마음 어딘가에서 용서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음을 뜻합니다. 아이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그렇게 배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확신이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자기 양심 안에 그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감독님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은, 용서하고 싶지 않거나 용서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 안에 딜레마를 일으킵니다. 그 상대가 아무리 간절히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라 해도, 문득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은 있을 것 같습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본질적인 무엇을 드러내는지도 모릅니다.

용서를 생각하면 우리 앞에 더 밝은 길이 열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에는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점은 주님의 기도에 드러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할 때 용서가 언급됩니다.

이는 우리가 용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이를 …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의 말로 표현하면, 존재와 행동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죄 자체를 용서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 잘못은 인간의 법정이나 하느님의 심판을 통해 판단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도 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도 똑같이 합니다. 아이가 잘못하면 꾸짖지만, 아이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너를 사랑하지만, 이런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아이가 잘못했다고 해서 그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지, 잘못된 행동 자체를 괜찮다고 선언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용서는 불가능해집니다.

범죄를 정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살아온 과정이 있고,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환경이 있습니다. 물론 자유롭게 범죄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부모가 자녀의 잘못에 대해 그 이유를 찾듯이, 우리도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 친구가 꼬드긴 겁니다.” 또는 “우리 아이는 원래 마음이 약합니다. 겁이 났던 겁니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녀를 감싸 줄 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우리도 누구에게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하도록 요청받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어에는 forgive와 pard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말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Pardon은 라틴어 perdonare에서 왔습니다. Per는 for에 해당하고, donare는 “주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용서란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은 일종의 해방입니다. “이것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쓰모토 감독: 이해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저는 감독이기 때문에 연기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배우가 뛰어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날마다 생각합니다.

흔히 훌륭한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것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영화를 많이 보시는 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런 연기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이 놀라운 연기를 보여 줄 때가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을 자주 기용하지만, 때로는 전문 배우가 아닌 성인을 출연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정말 뛰어난 연기를 보여 줍니다.

그런 연기가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보면 깨닫게 됩니다. 연기 능력을 훈련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그 이상의 무엇, 기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연기가 어쩌면 라포에 관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라포는 심리상담가와 내담자 사이에 형성되는 친밀한 관계를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먼저 배우가 자신이 맡은 인물과 가까워집니다. 다음으로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서로 가까워집니다. 이 두 가지 라포가 형성된다면 뛰어난 연기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것은 기도에서였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저는 이따금 어떻게 하면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일에는 연기와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첫걸음은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직을 수행한다면, 다가가고자 하는 그 사람과도 가까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받은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그릇을 통해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라포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인내와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세부적인 이야기는 많이 생략하겠습니다만, 저는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 개방이 이 이론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바치고 내어 준다는 점에서 용서와 비슷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매우 어려울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사카이 주교: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라포는 심리상담가와 내담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 없이는 그런 관계가 존재할 수 없겠지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배우는 자연스럽게 배역에 몰입하지만, 배우 자신도 여전히 그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배우와 등장인물이라는 두 사람이 있는 셈입니다. 저는 그 관계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마쓰모토 감독: 조금 더 설명드리자면, 사실 저는 배우들에게 등장인물 그 자체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등장인물은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인물 자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될 수 없으니, 그러려고 애쓰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배우들에게 자신을 이루는 요소들을 맡은 인물에게 드러내거나 내어 주라고 부탁합니다. 그 인물에게 자기 자신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그 인물이 줄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에게 그 인물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둘이 가까운 친구가 되고 나면, 배우는 그 인물이 느낄 법한 것과 매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면서 특정한 상황 속의 그 인물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그 인물 자체가 되려고 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배우 고유의 개성이 화면에 매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동시에 등장인물 고유의 개성도 드러납니다.

저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고 싶지만, 예수님과 완전히 똑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그분께 바치고 제 마음과 몸 안에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저 자신으로서, 동시에 예수님으로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카이 주교: 예수님께서도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이것은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스승이 학생을 대하는 관계에만 머무르지도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스승과 학생 사이의 거리보다 한없이 더 크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데도 우리가 그분을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라포의 관계를 그분과 맺도록 부름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기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께 자신을 보여 드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서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는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마쓰모토 감독: 기도 외에도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을까요?

사카이 주교: 예를 들면 음악입니다. 성가를 통해 그럴 수 있고, 더 넓게는 예술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술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예술가는 자연스럽게 그 관계의 무언가를 작품에 담아냅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만나는 사람도 거기에서 무언가를 받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