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과 성 호세마리아의 영적 인연

성 호세마리아의 삶과 오푸스데이의 초기 역사에는 가르멜과의 특별한 인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1928년 10월 2일 자신에게 맡겨진 오푸스데이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가르멜의 영적 전통에 깊은 애정을 간직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의 삶과 오푸스데이의 초기 역사에는 가르멜과의 특별한 인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1928년 10월 2일 자신에게 맡겨진 오푸스데이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가르멜의 영적 전통에 깊은 애정을 간직했습니다. 그 인연은 사제 성소를 발견하던 시기의 체험에서 시작되어 성모 신심과 영적 독서, 관상 수도자들과의 친교로 이어졌습니다.

1. 눈 위에 남은 맨발의 발자국

1917~1918년 겨울, 스페인 로그로뇨에서 젊은 호세마리아는 눈 위에 남은 맨발 가르멜 수도자의 발자국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이가 하느님을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바친다면 자신도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 체험은 그가 사제 성소를 생각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호세마리아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호세 미겔 데 라 비르헨 델 카르멘 신부에게 영적 지도를 받았습니다. 신부는 그에게 맨발 가르멜 수도자가 되는 길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호세마리아는 이를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수도회에 소속되지 않은 재속 사제의 길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훗날 그는 이 체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가르멜산의 성모님께서 저를 사제직으로 이끄셨습니다.”

2. 가르멜 제3회 입회

1932년 9월 12일, 성 호세마리아는 마드리드의 맨발 가르멜 수도원을 찾아 제3회 입회를 신청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2일, 오푸스데이 설립 4주년이 되는 날에 제3회 회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가 밝힌 입회 동기에는 성모님을 향한 사랑과 더불어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 가운데 성모님의 도움을 더욱 간절히 청하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 호세마리아의 성모 신심과 연옥 영혼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3. 십자가의 성 요한의 묘소 곁에서

제3회에 입회한 다음 날인 1932년 10월 3일, 성 호세마리아는 세고비아의 맨발 가르멜 수도원을 찾아 십자가의 성 요한의 묘소 가까이에서 7일까지 피정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을 구체적으로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적 빛을 받았습니다.

특히 10월 6일에는 대천사 미카엘·가브리엘·라파엘과 사도 베드로·바오로·요한의 전구를 청하며, 오푸스데이의 여러 사도직을 이들의 보호에 맡겼습니다. 이처럼 세고비아의 가르멜 수도원은 그의 개인적인 피정 장소이면서,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4. 가르멜 성인들의 저서에 대한 애정

성 호세마리아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곧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의 저서를 즐겨 읽었습니다. 그는 강론에서 이 영적 스승들을 자주 언급하고 그들의 글을 인용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의 친근하고 일상적인 문체는 성녀 데레사의 글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또한 “길”에는 성녀 데레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72항에서는 성녀의 말을 인용하며 날마다 성수를 사용하도록 권합니다. 이러한 대목들은 가르멜 성인들의 가르침이 그의 영적 독서와 설교 안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5. 가르멜산의 성모님과 스카풀라

성 호세마리아는 가르멜산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가르멜 스카풀라에도 특별한 애정을 지녔습니다. “길” 500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가슴에 거룩한 가르멜 스카풀라를 지녀라.”

가르멜과의 인연은 젊은 시절의 체험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신뢰와 스카풀라에 대한 신심은 그의 신앙생활과 영적 권고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6. 가르멜의 관상 수도자들과 나눈 친교

성 호세마리아는 관상 수도생활을 깊이 존중했으며 가르멜 수도자들과도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 한 사례가 1974년 7월 5일 칠레 산티아고의 맨발 가르멜 수녀원 방문입니다. 그는 원장 수녀의 초대에 응하여 수녀원을 찾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오푸스데이 사람들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관상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전 세계의 가르멜 수녀들이 자신들을 이해하고 기도로 도와준다는 사실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봉쇄 안에서 살아가는 수도자들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 다른 생활 방식 안에서도 기도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7. 성 호세마리아의 시복을 위해 인정된 치유 기적

성 호세마리아의 시복을 위해 인정된 치유 기적의 당사자도 가르멜의 영적 전통과 인연이 있는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콘셉시온 부욘 루비오(Concepción Boullón Rubio) 수녀로,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가 설립한 가르멜 자선 수녀회(Carmelitas de la Caridad) 소속이었습니다. 이 수녀회는 앞서 언급한 맨발 가르멜 수녀회와는 구별됩니다.

이 치유가 성 호세마리아의 전구로 이루어진 기적임을 인정하는 교령은 1991년 7월 6일에 공포되었습니다.

8. “성 호세마리아 사전”과 몬테 카르멜로 출판사

가르멜과의 인연은 출판을 통해서도 이어집니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사전”은 2013년 몬테 카르멜로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 역사연구소의 주도로 편찬된 이 사전에는 32개국의 필자 226명이 집필에 참여했으며, 288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눈 위의 발자국에서 시작된 인연은 성모님을 향한 신심, 성인들의 저서, 수도자들의 기도와 우정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살아가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영적으로 도울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록

1990~1991년의 두 회헌과 복자 알바로 델 포르티요

맨발 가르멜 수녀들의 회헌 개정 과정은 전통의 계승과 수도생활의 쇄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이 역사를 살펴볼 때에는 당시의 의견 차이와 갈등, 교황청의 공식 결정, 개별 인물의 관계와 역할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공의회 이후의 쇄신과 전통의 계승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맨발 가르멜 여자 수도원들은 회헌을 새롭게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대의 변화에 맞춘 쇄신을 강조하는 견해와, 성녀 데레사에게서 이어받은 생활양식의 보존을 강조하는 견해 사이에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특히 예수의 성녀 마라비야스의 전통을 따르던 일부 수도원들은 개정 과정에서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논의에는 각 수도원의 자치, 수도회 장상과 여자 수도원의 관계, 원장의 권한, 봉쇄 수도생활의 실천과 같은 구체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만 설명하면, 수도생활의 실제 문제와 그 안에 담긴 다양한 판단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2. 1984년의 서한과 두 회헌의 승인

1984년 10월 15일,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추기경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뜻에 따라 가르멜 수녀들에게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 서한은 일부 수도원들이 요청한 회헌을 마련하는 데 지침이 되었습니다.

1990년 12월 8일, 교황청은 이 지침에 따라 마련된 회헌을 승인했습니다. 승인 교령에는 아빌라의 성 요셉 수도원과 세로 데 로스 앙헬레스 수도원이 다른 수도원들을 대표하여 요청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수도원들도 이 회헌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1991년 9월 17일에는 또 하나의 회헌이 승인되었습니다. 이로써 1990년 회헌과 1991년 회헌이라는 두 회헌이 마련되었으며, 각 수도원은 교황청이 승인한 두 본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두 회헌과 가르멜의 일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1년 10월 1일 서한에서 두 회헌 모두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를 충실하게 해석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교황은 그 차이가 관상적 카리스마의 본질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응과 수도회 법규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교황은 두 회헌의 승인이 가르멜 전체의 영적 일치를 지켜 나가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랐습니다. 이 설명을 존중하면서도, 승인에 이르는 과정에서 의견 차이와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청의 승인과 당시의 역사적 긴장은 구분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4. 복자 알바로 델 포르티요에 관한 자료

복자 알바로 델 포르티요와 세로 데 로스 앙헬레스 수도원 사이의 서신 교류는 수녀들의 증언에서 확인됩니다. 이 수도원의 부원장이자 수련장이었던 팔로마 데 헤수스 수녀는 원장 마리아 호세파 델 코라손 데 헤수스 수녀와 함께 그의 편지들을 받아 보았으며, 그 안에서 관상생활에 대한 깊은 존중과 겸손을 느꼈다고 증언했습니다.

한편, 1990년 12월 15일자 “엘 파이스”는 알바로 델 포르티요가 1984년 카사롤리 추기경의 서한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수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Laus Deo!”(하느님께 찬미!)라고 표현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확인한 것은 당시의 보도이며, 해당 편지의 원문이나 전문을 직접 대조한 것은 아닙니다.

5. 확인되는 사실과 해석의 한계

이 자료들은 알바로 델 포르티요가 가르멜 수녀들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관상 수도생활을 존중했다는 점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수도원들과의 친교, 특정한 소식에 대한 반응, 오푸스데이의 기관 차원의 입장, 교황청의 결정 과정에서 맡은 역할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따라서 현재 제시된 자료만으로 오푸스데이가 가르멜의 분화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거나, 알바로 델 포르티요가 교황청의 결정을 좌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근거 역시 이 자료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의 구체적인 역할을 밝히려면 관련 서신과 결정 과정의 문서를 더 폭넓게 살펴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