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주교의 12월 사목서간

신앙의 해를 마치며, 단장주교는 신앙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방법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영적 자녀들이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로마 교황께서 신앙의 해를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인 이 향주덕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주님께 지속적으로 adauge nobis fidem,1 ‘믿음을 키워주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더불어 희망과 사랑, 경건함도 성장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이 은총의 기간에 우리가 받은 힘으로 지금부터 계속해서 하루하루 천국에 이르는 길을 걸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성자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에 충실하고자 하는 우리의 원의가 실현되도록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가르쳐 주시는 신앙의 스승이신 성모님께 의탁합시다.

교회의 교도권 문서들(그리고 또한 최근의 회칙 「신앙의 빛」)은, 신약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신앙의 기원에 있는 두 가지 특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성 바오로는 fides ex auditu,2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읽혀지고 환영받는 데에서 오는 신앙을 강조하였습니다. 한편 성 요한은 육화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서 세상에 오시어3 하느님 안에 감춰진 신비를 알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빛과 말씀, 말씀과 빛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불가분한 측면들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신앙이 빛임을 알아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불꽃이 사그라지면 모든 다른 빛들도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4 나의 자녀들이여, 성령께서 교회의 교도권과 성인들의 삶을 통하여 부단히 우리 안에 밝혀 주시는 밝은 빛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 빛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합시다.

지난 달에 “성 호세마리아와 신학적 사상”에 관한 회의가 로마에서 열렸습니다. 참석자들은 어떻게 성인들의 가르침과 증언이 신앙을 보다 깊이 천착하고 결과적으로 교리의 신학적 해명을 심화하는 데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는지 분석하였습니다. 이 심포지엄은 신학적 견지에서 1928년 10월 2일에 우리의 아버지께서 특히 가정과 직장, 사회활동 등 일상의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파할 사명과 함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의 특별한 뉘앙스를 보다 널리 알리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지난 여러 달 동안 나는 신경에 포함된 신앙의 진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덕이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나 자신과 여러분을 돕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신앙이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에서 보여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이 진정으로 우리의 정신을 비추고 의지를 강화하며 마음을 밝혀주어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표현하고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시작점은 우리가 예수께서 남겨주신 성화의 수단을 교회 안에 충만히 가지고 있음을 완전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회칙 「신앙의 빛」이 분명히 하는 바 같이 특히 성사를 영하고 하느님과 교회의 계명을 충실히 이행하며 기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사는 영광되이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이 영혼들을 성화시키기 위하여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행위입니다. 성령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문화는 이 세상에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저 너머에, 현실의 다른 차원에,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곳에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맞는다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의 사랑은 참으로 강력하지도, 참으로 실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5

상당히 젊은 시절에 이미 분명하게 정식화된 성 호세마리아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자주 우리는 그분께서 저 멀리, 별이 빛나는 어딘가에 떨어져 계신 듯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계속해서 우리 곁에 계심을 잊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제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축복하시면서... 그리고 용서하시면서. . .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고 또 완전히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또 하늘나라에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라는 것, 아주 많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말입니다.”6

이것은 특히 고해성사를 볼 때와 영성체를 할 때 그러합니다. 이 신앙의 진리에 힘 입어, 우리는 주님의 용서와 친밀함에 얼마나 큰 안정을 찾으며,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큰 평화가 넘치고, 또 얼마나 열성적으로 이 평온을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되는지요! 그러므로 나는 전혀 지치지 않고 주장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사들을 받을 때마다 성령께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를 성부의 사랑으로 이끄시는 것이라는 완전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고려를 우리 자신의 내적 투쟁에 적용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성인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결점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신적인 생명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구제책을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사의 은총과 기도로 하느님 법의 계명을 실천하고 각자가 처한 삶의 의무에 충실하기가 더욱 쉬워집니다. “십계명은 일단의 부정적 명령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자폐적인 자아의 황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대화에 참여하고 그분의 자비에 감싸여 다른 이들에게도 그 자비를 전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지침입니다.”7

주님께 강한 신앙을, 우리의 모든 행동을 살아있게 할 신앙을 내려주시기를 청합시다. 분명히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는 존경심을 가지고 복음을 읽고 묵상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말씀은 우리의 모든 각각의 행동을 변모시킬 정도로 우리 영혼 안에 깊이 침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메마름을 느끼거나 환경적 장애를 만날 때, 우리는 낙담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하자면, 잠들어 버린 것은 아닙니까? 은총을 통하여 우리 영혼 안에 기거하시는 성령의 작용에 더욱 의지해야 하지 않습니까? 때때로 우리 자신의 힘을 너무 신뢰하지는 않습니까? 성령강림 때 사도들이 겪었던 변화를 묵상하고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의 지침에 부합하게 살도록 노력합시다. 이는 교회가 항상 권고하는 그리스도적 신앙행위를 통하여서도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묵상기도, 화살기도, 염경기도 (대표적으로 묵주기도), 작은 고행, 양심성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일을 잘 마무리 하는 것.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내적 생활은 느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사랑 때문에 하루하루, 다달이, 해마다, 우리 전 생애 동안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가치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될 때 얼마나 많은 빛을 받게 되는지요! 자녀들이여, 우리는 이 빛을 모두 담아두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 안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이 모든 은총―명료함, 빛, 헌신의 기쁨―을 담을 저수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밤이 오면, 어둠과 쓰디쓴 고난이 오면, 우리는 하느님 은총의 깨끗한 물을 담은 저수지로부터 힘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이 순간에 내 비록 눈멀었으나 볼 수 있고, 내 비록 메말랐으나 그리스도의 성심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흐르는 물로써 적셔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나의 자녀들이여, 우리는 투쟁 중에도 계속 버텨나가게 될 것입니다.”8

그리고 또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도와 그들 또한 신앙의 길을 따라 안전하게 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보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9 우리 주님의 시선은 개개인 하나하나 그리고 다중을 향합니다.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구원 사업을 계속하십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접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교도 세계의 개종을 불러온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하였던 바입니다.

초기 시절 묵상에서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이러한 우리 신앙의 첫 형제자매들의 모범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순교와 가혹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배우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는 사업에서 그리스도의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교 숭배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계보를 전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나아갑니다. 머지않아 ‘뾰족한 막대기를 차던’(사도 9:5 참조) 박해자 사울이 그들에게 동참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함께 설교하고 함께 영광된 모험을 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피로써 새기게 됩니다. 그들 모두는 정결함으로써 이교도 세계의 침침하고 더러운 물을 정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들은 작은 덕행과 겸손, 건전함으로써 그 사회의 쾌락주의와 싸웁니다. . . 그들은 고대 세계의 중심, 로마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역사는 답을 줍니다. 황제의 자리는 전복되었으나 오늘날, 이천년이 지난 후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로마의 주교입니다.”10

오늘날 또한 새 복음화의 도전에 맞서 우리는 희망을 밝혀 두어야 합니다. Non est abbreviate manus Domini,11 하느님의 손은 짧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이 성경이 전하는 기적들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수일 전에 교황께서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발표하셨는데 최근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결론을 담고 있으며 특히 새 복음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위대한 도전에 가일층 힘을 불어넣을 새로운 빛을 주는 이 문헌을 읽어 보기를 장려합니다.

나는 다가오는 12월 12일 과달루페 성모 축일이 1931년에 성경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성 호세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기념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푸스데이의 발전에 큰 장애를 겪던 순간에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린 말씀은, inter medium montium pertransibunt aquae,12 (골짜기마다 샘을 터뜨리시니 산과 산 사이로 흘러내려) 이었습니다. 은총의 물길이 산과 산 사이를 흘러 영혼과 교회와 인류의 삶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반대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세상을 이기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13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입으로 말하시고 오푸스데이 창설 직후 적어두셨던 화살기도를 현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Regnare Christum volumus!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는―한번 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에 놀라면서― 특히 성경 독서와 묵상에서 하느님의 빛과 말씀에 매 순간 열려있고자 하는 원의를 새롭게 할 좋은 계기입니다.

이 시기의 관문은 무염시태 성모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스승이요, 우리의 희망이며 우리의 마음과 정신, 감각을 온전히 하느님께 몰입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경이로운 모범이십니다. 이제 아주 얼마 남지 않은 이 대축일을 천국에 계신 우리 어머니에 대한 자식다운 큰 사랑으로 정성 들여 준비합시다.

기도 중에 교회와 교황님 및 그 보좌진을 위해, 나의 지향을 위해, 그리고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 필요를 위해 청원할 넉넉한 공간을 마련해 놓읍시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물질적이고 영적인 문제들―때로는 참으로 비극적인―에 무감각해 지지(감사하게도 확실히 이렇게 되진 않습니다) 않도록 합시다.

오푸스데이의 많은 기념일들이 이 달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 1953년 로마성모대학 설립일이 있습니다. 오푸스데이 역사의 모든 이정표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2013년 12월 1일 로마에서

여러분의 아버지

+하비에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