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위대한 것 (4): 어머니, 아버지를 위한 것

'부모로서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아이들을 반기는 것에서 끝이 아니다. 아이들의 일생을 책임지며, 그것은 천국으로까지 이어진다.'

사랑이라는 좋은 것
Opus Dei - 사랑이라는 위대한 것 (4): 어머니, 아버지를 위한 것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과 이야기하려 혈안이 되었다. 예수님 앞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무릎을 꿇은 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저의 두 아들이 주님의 왕국에서 각자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오20: 21) 라고 말하였다. 어쩌면 주님은 그녀의 당찬 요구에 웃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두 아들에게 그녀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안겨주실 것이다. 그들은 마음의 안식을 얻을 것이며, 영원하고 범우주적인 사명을 얻을 것이다.

당시의 초대 교회는 오늘날 새로운 사도의 충동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로마의 교황님을 통해 우리의 주님은 그녀를 '재 탄생한 복음화'로 초대하고 계신다. 그것은 새 천 년에 들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가족은 이 모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주역은 모든 어머니들, 아버지들과 조부모님들이다. 그들은 복음화의 최전선에 있다. 가족은 삶에 주님의 사랑이 현존하게끔 실현시켜 주는 안식처 같은 곳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이 없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일생 동안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를 통해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과 다른 이들이 모양새를 갖춰가는 모습을 본다. 집이란 주님이 씨앗을 뿌리기에 좋은 토양을 갖춘 알맞은 환경이므로 어떤 경우에는 백배, 또 어떤 경우에는 예순 배나 서른 배의 열매를 맺기도 한다. (마태오 13:23)

성인들이 부모님

호세마리아 성인은 주님께서 오푸스데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광대하고 신성한 전경을 보여주셨을 때 아직 어린 사제에 불과했다. 그는 이 소명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영적 지도자에게 더 많은 기도와 참회를 하고자 청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뒷받침 하기 위해 그는 선생님에게 '보세요, 주님께서 저에게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성인이 되어야 하고,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성인들의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우리는 이러한 호세마리아 성인의 말씀을 가정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어떤 식으로든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은 주위의 사람에게 나누고 빛이 될 때 그 가치를 인정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신성을 열망한다면, 우리 개개인은 '성인이자, 아버지, 스승님, 그리고 성인들의 안내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호세마리아 성인은 '결혼의 소명'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이러한 표현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할거라는 걸 아시면서도 결혼이 진정으로 성화되는 길이자 부부의 사랑이야 말로 하느님의 사랑과 많이 닮아있다고 굳게 믿으셨다. 눈길을 사로잡는 재치 있는 발언으로 그는 '나는 내 두 손으로 이 사랑을 축복한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왜 두 손으로 축복을 내리냐고 묻는다면, 나는 손이 네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로서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아이들을 반기는 것에서 끝이 아니다. 평생 동안 지속되는 것이며 그 목적지는 천국이다. 때로는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위태롭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부성과 모성은 아주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가능케 한다. 그 어떤 엄마라도 병상에 누워있는 아이를 기꺼이 대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자식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영예로워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예로 아브라함과 사라, 모세의 어머니,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마카빈의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 예수님께 딸을 청하던 가나안의 여인, 나인의 과부, 엘리사벳과 즈카리아, 그리고 가장 특별한 우리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계신다.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가족이 새로운 세대에 성스러운 남성과 여성상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우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이 십자가의 고난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만큼 큰 기쁨과 만족도 따르지만 아이를 키우고 성장시키는 일에는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밤과, 사춘기 시절의 반항, 힘든 취직의 기회, 알맞은 배우자를 찾기 위한 고민까지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따른다.

특히 마음이 아플 때는 아이들이 교회와 멀어지려 할 때나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을 지켜볼 때이다. 부모는 믿음으로 아이들을 키우려 진심으로 노력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주려 노력한다. 그렇기에 자식이 잘못된 길로 빠지면 부모는 대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자문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상처 받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의 교육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유일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아니다.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 아이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기도 하고 그것을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때로는 믿음을 멀리하고 현실감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길을 따를 것인지 직접 선택할 자유가 있다.

때로는 아이들도 부모에게 받은 것들에 대해 재발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이럴 때에 부모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실수로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견고한 사랑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더 멀어지게끔 하는 과도한 중압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저 기다리면 된다. 기도하고, 참을성을 갖고 기다리고, 상냥하고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라.' 돌아온 탕자에 나오는 아버지는 이것의 좋은 본보기이다 (루카 15장 11-32절).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에게 아이들의 자유 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만드는 결정들이 비록 선한 마음에서 나왔을지라도 부모의 의견과는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부모는 어릴 땐 거의 모든 일에 자신을 필요로 하던 자녀가 커가면서 그들의 삶에 단순한 구경꾼이 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때가 아이들에게 가장 부모가 필요한 시기이다. 어릴 적 자신을 먹여주고 걸음마를 떼게 해준 부모가 자식이 새로운 여정을 펼쳐나가며 자유 의지를 키워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옆에 있어주면 된다. 이제 부모는 선생님이자 안내자이다.

성인들의 스승님

부모는 알게 모르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승이다. 거의 삼투적으로 부모는 자식들에게 평생 지니고 가게 될 수많은 것들을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술 행위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고, 또 사랑 받는 행위이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이다. 우선 부모는 자식들이 논할 가치가 없는 편견들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예를 들면 자유란 '본인의 변덕을 따르는 것, 그리고 법적 제제를 받지 않는 것' 이라는 사고 방식 등 이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진정한 도전은 자식들이 참을성과 인내를 가지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점점 좋아하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은 부모들이 알려주는 것을 따르는 어려움뿐 만 아니라 선을 따르는 기쁨을 수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성장의 길목에서 자식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 역시 자식들을 더 올바르게 가르치도록 배워 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을 키우며 하는 이런 저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정에서 배운 것들의 진가를 깊이 깨닫게 된다. 당신 어머니의 조언을 빗대어 호세 마리아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년이 흐른 뒤에야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결국, 그게 언제일지라도,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인생의 해답을 얼마나 잘 가르쳐 주었는지 알아가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발문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미래에 좋은 삶을 위해서는 집에 대한 좋은 기억들, 특히 유년기 때의 추억들 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고, 건강하고, 좋은 것은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교육에 대해 왈가왈부해도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신성한 추억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평생 그러한 기억들을 가지고 간다면 눈 감는 날까지 안전할 것이고, 가슴 속에 좋은 추억만 남는다면 그 기억들이 때로는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사명이 씨를 뿌리고,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 근면한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비록 모두 좋은 결과를 보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성인들의 안내자

안내자란 다른 이들을 이끌어주고 가르치거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그 분야를 잘 알아서, 그 길을 처음 떠나는 이들을 잘 동반해 주어야 한다. 좋은 안내자와 선생님들은 마음과 정신 모두가 잘 형성되도록 돕는다.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아들들과 예수님의 길을 동반하여 따랐으며 십자가 발 아래에도 함께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발 아래 살로메과 함께 했지만, 주님을 위해 가장 처음 순교한 것은 첫째인 야고보였다. 주님이 돌아가신 뒤 주일에 무덤에 함께 있었던 것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살로메이다. 곧 요한이 그 뒤를 따랐다.

모든 안내자들은 가끔 복잡하고 힘겨운 여정과 마주해야 한다. 삶이라는 여정 안에 그 힘든 길 중 하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자식들이 자신의 소명을 통찰력 있게 따르도록 함께 해주는 것은 부모 자신의 사명이기도 하다. 왜 그들이 이 도전적인 단계를 두려움으로 맞서는지 이해 할 수 있다. 호세마리아 성인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움? 나는 요한1서 4장에 있는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Qui autum timet, non est perfectus in caritate (요한4장18절). 사랑 안에 두려움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당연하게도 부모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녀의 행복이다. 하지만 대부분 부모는 행복 하려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이미 생각하고 있다. 간혹 부모들은 자녀의 재능과는 상관없는 전문직을 꿈꾸기도 한다. 혹은 자신의 자녀들이 잘하되, 넘치지 않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들은 복음의 근본적인 것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특히 깊은 신앙과 함께 자라왔다면, '아이들은 각자 자율적으로 만들어낸 생각과 계획들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되돌아 보게끔 한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교육은 책임감 있는 자유를 장려한다.' 라는 것이 불가피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보통 자기 자녀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그들에게 최고의 것들만 주고 싶어하기에, 그들이 선택하는 삶의 결정들이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자녀들의 번영을 위한 미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보호해주고 도와주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주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부모는 신중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아름다운 역을 직면하게 된다. 호세마리아 성인이 자신의 소명에 대해 아버지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는 아들에게 '조금만 더 생각하거라' 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내 '내가 장애물을 놓지 않겠다' 라고 더하셨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의 영적 결심에 대해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조언을 하려 노력하면서도,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들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주님의 은혜를 감지하고, 좋던, 싫던 주님의 크신 계획에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아이들은 본인의 소명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설지 잘 알지 못한다. 호세마리아 성인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우시는 것을 보았을 때가 신부님이 되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라고 하셨다. 부모가 원한 길이 아닌 전혀 다른 길을 자녀가 택할 때에는 부모의 큰 관대함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주님이 부모에게 덜 바라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런 희생 역시도 신성한 주님의 은총이다. 이러한 '충격' 역시 중요한 순간일 수 있다. 호세마리아 성인이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자식이 오롯이 주님을 향한 소명을 갖는 것의 구 할은 부모에게서 온 것이다. 주님은 자녀의 사랑이 충만하고 자율적인 선택을 받아들이는데 따르는 부모의 희생을 잘 알고 계신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신 그분은 부모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 하신다. 주님께서 자녀를 부르신 것을 알고, 그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지 않고 관대히 받아드릴 때 이들을 위한 많은 천상의 넘치는 축복을 끌어오게 된다. 이것은 세기를 넘어서 반복되어 왔다. 예수님이 요한과 야곱을 부르시며 모든걸 내려놓고 따르라 하셨을 때 그들은 아버지를 도와 그물을 깁고 있었다. 제베대오는 계속 하던 일을 하였고, 어쩌면 조금 화가 났을지 모르나, 아들들을 보내주었다. 어쩌면 주님 당신이 그의 가족에 들어오려고 하셨음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엔 그의 두 아들이 '해안 없는 바다'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됨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는가.

그 어느 때 보다 더 필요한 때

딸 혹은 아들이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부모의 존재는 더욱 절실하다. 부모는 멀리서도 자식 안의 작은 슬픔도, 진정한 기쁨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녀들이 행복하고 성실하게 자라기 위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어쩌면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첫 번째는 자신이 부여 받은 능력을 알아채는 것이다. 주님의 현존 안에 다음과 같이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이 자녀들을 부를 때 이것은 부모의 희생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이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일은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엄청난 영광이다. 위대하고 거룩한 자부심을 위한 동기이자, 편향의 증표이며, 주님의 특별한 애정이다. 부모를 통해 영적 소명이 가능할 수 있으며, 이것은 삶이라는 선물의 연장이다.' 호세마리아 성인은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축하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마음의 조각들을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롯이 당신만을 위해.'

주님의 눈에 부모의 기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놀라운 예는 성서와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이 기록 되었던가?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아마 성 아우구스티노를 변하게 한 성녀 모니카의 끈임 없는 신뢰와 기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예들이 존재한다. 모든 성소의 보이지 않는 곳에는 '누군가의 강력하고 깊은 기도가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공동 사회.. 주님의 부르심은 기도를 통해, 기도 안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만 인내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성소의 길로 접어들고 나면 마지막까지 그 소명을 지켜내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의 깊이에 따라 결정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도와 함께 부모는 자녀 가까이 머물러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새로운 길에 관심을 갖는 것이 그의 성실함을 지켜내는데 큰 도움이 된다. 부모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원대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녀가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갈 때 도움이 되고, 또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때로는 자식이 먼저 조언이나 도움, 기도를 부탁할 때도 있을 것이다. 자식의 소명을 통해 자신들의 신성한 부름을 발견하게 되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이야기 역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야곱과 요한의 헌신의 과실(열매)은 측정 불가능 하다. 하지만 교회의 이 큰 기둥들을 소명으로 이끈 데에는 분명 부모의 역할이 가장 크다. 야고보는 주님의 사랑을 세상의 끝에서 끝으로 전파했으며 요한은 이러한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을 글로 선포하였다. 그들의 희생으로 믿음을 얻은 모든 이들은 갈릴레오의 해안에서 온 이들 부모에게 깊이 감사해야 한다. 제대베오와 살로메의 이름은 사도들과 함께 세상 끝 날까지 기억될 것이다.

'받아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쳐질 내 몸이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본인의 자녀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을 본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사 중 봉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본인의 삶에서 이미 경험 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삶과 양분을 위해 자신의 자녀를 바쳤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 안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이 새로운 '예(yes)'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서 하나되고 이는 예수님의 고난의 '예(yes)'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은 겸손한 마리아의 '예(yes)'로부터 시작된다.

디에고 잘비데아 신부


[1] 성바오로6세,교황권고, Evangelii nunitandi 복음 선포자들 (1975.12.8일) 82항.

성요한바오로2세,교황서한, Novo millennio ineunte 새 천년 (2001.1.6일) , 40항.

베네딕토16세,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주교 대의원 회의” 강론 (2012.10.7일)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Evangelii Gaudium 복음의 기쁨 (2013.11.24일), 27항.

[2]페르난도 오카리스 몬시뇰, 서간 (2017.6.4일)

[3]가톨릭 교회 교리서, 1655-1666.

[4] 성 호세마리아, 개인 노트, 175항.

[5] 성 호세마리아, “길”,27항.

[6] 성 호세마리아, “하느님의 친구들” ,18항.

[7] 교황 프란치스코, 일반일현 (2015.2.4일)

[8]페르난도 오카리스 몬시뇰, 사목 서간 (2018.1.9일)

[9] Reaching the Entire Person, Role of the Emotions 참고. (1) opusdei.org

[10] 성 호세마리아, 가족모임기록물 (1958.2.17일)

[11] 성 호세마리아,청년들과 모임 중 (1972.11월)

[12]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Amoris Laetitia 사랑의 기쁨” (2016.3.19일)

성 호세마리아는 이런 걱정을 유머러스한 방법으로 가족모임에서 말씀하였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이미 어떤 아가씨와 결혼시킬 준비를 합니다. 아빠는 어떤 공부를 시키고 아니면 사업을 시킬지 생각하기 시작하지요. 각자 소설책 한 권을 씁니다. 근사하고 로맨틱한 소설이지요. 아이는 총명하고 착하게 큽니다. 부모님이 선한 분들이니까요. 그리고 아이가 말합니다: ‘부모님의 쓰신 소설책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아요’ 따라서 우리는 울화통이 터집니다”.(1972.11.4일)

[13] 성 호세마리아는 스페인어 ‘De tejas para abajo (지붕 아래)’ 관용을 이용하는데 ‘집안 걱정들’ 뜻에 가깝다. Cf. Javier Echevarría, Memoria del Beato Josemaría Escrivá, Rialp, Madrid 2000, p. 99.

[14] Ana Sastre, Tiempo de caminar, Rialp, Madrid,1989, 52 페이지.

[15] Andres Vazquez de Prada, The Founder of Opus Dei, Vol. I, 73페이지.

[16] 성 호세마리아, Conversations, 104항.

[17] 성 호세마리아, “단련” ,18항.

[18] 성 호세마리아, 가족모임 중 (1960.10.22일).

[19] 교황 프란치스코, Regina Caeli, (2013.4.21일)

[20] 로마 미사예식서, 감사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