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위대한 것 (3): 우리의 진실된 이름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진실된 이름을 우리 자신에게 드러냅니다. 소명에 관한 시리즈 안에 수록되어 있는 새로운 기사

성경 제 1권은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생명체들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자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창세기 1장 1-25). 그러나 인간을 창조할 때가 다가오자, 다른 무엇인가가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종이나 어떤 존재를 만들기 보다는 개인적인 이름을 부여하고, 직접 만드시고 각별하게 부르심을 받아 존재하는 생명체이자 하느님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해 내신 것입니다.

창조 때 말씀부터 성경의 마지막 권까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가 받은 이름 말고도 우리는 삶의 끝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요한묵시록 2:17). 우리는 삶의 마지막에 주어질 이 새로운 이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소명의 신비와 마주치게 됩니다.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밝혀지는 개인적인 신비를 말입니다.

자유롭고 끝나지 않은 것

장미, 떡갈나무, 아니면 말은 그것들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단순히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것들은 자라서 완성되고 마지막으로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특히 청소년기에는, 단순히 ‘하나 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성과 이름을 가진 독창적인 사람, 복제할 수 없는 확실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다른 것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 그리고 우리의 세상이 어떤 곳이었으면 좋은 지 꿈을 꾸도록 촉구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것을 순진하고 현실성이 없는, 조만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꿈을 꾸고자 하는 욕구는 우리 자아의 가장 높은 곳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름과 성을 포함하여 무엇이 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욕망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자 하셨는지를 알게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기 2:1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보존하고, 아름다움 속에서 세상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믿으셨고, 그래서 성 호세마리아가 항상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세상을 ‘열정을 다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1]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삶의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성격을 발전시키도록 온전히 맡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인 자유와 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능력을 키우도록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에게 무엇인가를 원하시고 당신들에게 희망을 품습니다.” 교황 프란시스코는 세계 청년의 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꿈을 꾸도록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시려고 하십니다.” 당신이 당신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는 한, 세상은 절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을 향한 과제입니다.”[2]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당신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시몬은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듣고자 그의 형제 안드레아를 데려갑니다. 갈릴래아에서 유대아까지는 꽤 먼 길이었지만, 충분히 갈 가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예언자를 보내신지 이미 수 세기가 지났고, 지금 새로운 예언자인 요한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낸 참 예언자들 중 하나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는 요르단강 둑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고 그날 오후를 예수님과 이야기하며 보냅니다. 안드레아가 그의 형제 시몬에게 돌아와서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참고: 요한 복음서 1:41-42). 시몬은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 메시아가 과연 도착한 것이었을까요? 성서의 예언처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곧 변하려는 것일까요? 그들이 선생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며 이르시기를,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케파는 돌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바뀌기 전에, 시몬의 삶이 먼저 바뀌어야 했던 것이지요.

그에게 맡겨진 미션을 통해, 복음서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계속 발견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가 곧 갈릴래아로 돌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시몬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에게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배를 뭍에서 조금 저어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낚시를 했음에도 아무것도 잡지 못한 시몬은 분명 그렇게 하기가 조금 꺼려졌을 것이었습니다. 시몬이 사람들과 대화를 마쳤을 즈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요청을 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이라”(루카 복음 5:4). 그날 밤, 물고기를 잡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고, 환한 대낮에는 물고기들이 그물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던 시몬에게 이 요청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요청에 따랐고, 그는 곧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을 보게 됩니다. 그의 배에 타고있는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어쨌든 시몬 베드로는 이 광경을 보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복음 5:8)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복음 5:10)라고 대답하십니다.

시몬이 누구인가요? 그의 가족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갈릴래아의 어부일까요? 그는 몇 년을 어부로 살았고, 낚시를 굉장히 잘 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정말 그의 직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에 예상하지 못한 빛을 비추십니다. 주님이 다가오심으로써 그는 참 모습을 드러냅니다.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참 모습을 말이죠. 이 신성한 부르심을 듣자, 베드로와 그의 형제는 배를 저어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루카 복음 5:11). 베네딕토 16세는 이 복음 장면을 떠올립니다. “베드로는 어느 날 로마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그가 주님을 위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 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는 갑작스러운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자신이 이러한 대단한 모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관대했고 자신의 한계를 알았지만, 부르시는 분을 믿었고 마음의 꿈을 좇았습니다. 용기 있고 관대하게 ‘네’ 라고 대답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3]

나중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가 행할 미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16:18). 하느님과 함께 삶을 나누자는 부르심,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창조와 같은 변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창조가 개인적인 부르심을 포함하듯이, 개개인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급진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름과 삶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누가 갈릴래아 호수 연안에서 이천 년 전에 살았던 어부를 오늘날 기억하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몇 명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리는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를 여전히 공경하겠습니까?[4]

숨겨진 보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미션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빛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굉장히 불안정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잃을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 안에서 우리는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베드로의 삶을 회상하는 것은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과연 베드로는 자유를 잃었을까요? 이 결정이 가장 자유롭고 그의 삶 안에서 ‘자유롭게’하는 결정이 아니었을까요? 가끔 우리는 자유를 아무 제한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능력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 자유는 우리에게 단지 잠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선택으로 축소됩니다. 가령 우리가 햄버거를 먹을 것인지 치킨을 먹을 것인지, 축구 또는 농구 중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이 노래를 또는 다른 노래를 들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삶을 더 자유롭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과 동시에 삶에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주는 다른 유형의 선택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결정할 때 나타납니다. 자유는 ‘자유롭게’하는 능력 속에서 참 빛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것들은 이제 더 이상 잠깐의 결정이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줄 만한 선택이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물 같은 사람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비슷하게, 어떤 젊은 사람이 의사가 되기로 한 것이 대단한 노력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알면서도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자신을 희생하거나 미션을 수행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시 재정의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한 사람이 미래에 내릴 결정에 제약을 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단계는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그 대신에 삶을 의미로 채우는 사랑이나 목표를 위해서 한 사람의 삶을 감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이름은 더 이상 단순히 세례 때 받은 이름이 아니라 이제 ‘남편의 또는 아내의…’나 ‘의사…’도 됩니다. 그들의 이름과 정체성은 더 확실한 모양을 띄게 되고, 그들의 삶은 더 확실한 의미와 방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정확히 이런 유형의 선택권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특정한 선물과 자질과 함께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 안에 ‘숨겨져’ 있는 미션인 ‘보물’을 보여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복음 13:44). 보물은 사실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 말이죠. 그리고 미션은 하느님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발견했다면, 저는 더 이상 그것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모든 삶과 함께 그것을 포용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그것의 모든 측면을 만드실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며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처럼, 비유대인의 제자였던 바오로처럼, 그리고 구세주의 어머니이자 주님의 종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 안으로 초대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러한 미션을 포용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한쪽으로 치워 놓게 만듭니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절). 또한 우리는 성 바오로와 함께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피서 3:7-9)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계신 지를 아는 것은 처음에는 좀 불확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하기를 멈춘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 적성, 경험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이것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이름은 마치 세상창조 때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 지나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보물, 사명…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진정 나에게 관심을 보이신 것일까?

내 선물과 적성의 적용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 삶의 특별한 순간에만 우리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우리를 부르시죠.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새로워지는 사랑과 함께 매일 더 깊게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 동안 이어집니다. “당신이 ‘네’라고 대답한 이후, 시간은 당신의 지평에 더 새롭고 밝은 색을 주어 매일 더 아름답게 만들고, 당신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당신은 계속 ‘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성베드로는 주님께 ‘네’라고 수 없이 많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떠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참고. 요한 6:60-71).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게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참고. 요한 13:6-10).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남았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주님을 잘 못 이해한 적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를 꿈꾸었고,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온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배신자가 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베드로는 본인의 나약함과 정면으로 마주쳐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의 눈을 예수님으로부터 결코 돌리지 않음으로써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한 마디 비난도 없이, 사랑에 가득 찬 시선으로 베드로를 바꿔 놓았습니다.”[6] 소명은 결국,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게 하려고, 예수님의 삶을 공유하고 예수님을 본받게 하는 초대장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온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눠주고 사랑이 가득 찬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부르심은 그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난 날 결정적인 모습을 갖춥니다. 베드로는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었고, 얼마나 하느님께서 그를 가련한 마음으로 사랑하셨으며, 그도 똑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신성하신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7). 이것은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마음속 깊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봉사하는 놀라운 길 위에서 말이죠. 특히, 목표가 아닌 길 말입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매일 예수님과 함께 같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가득 채워진 삶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전통은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그의 순교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가 형벌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힘세고 굳건한 기질을 가졌던 젊은 시절의 삶, 갈릴래아에서 어부의 삶 등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그 뒤로 놀라울 만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즐거움과 고통도 수반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은 사랑으로 그의 삶 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그의 삶은 분명히 크게 변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는 것이죠.

요르단강 근처에서 시몬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는 시몬을 어떤 특정 인간이 아닌 베드로를 보십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지을 수 있는 반석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볼 때도, 우리 각자의 삶에서 우리가 행할 모든 좋은 것들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재능을, 세상을, 역사를 보시고, 우리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예수님을 따를 것을 제안하십니다.

우리의 됨됨이는 덜도 더도 아닌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따르도록 합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것을 위해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자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 12:6-8)

베드로는 벳사이다의 어부로서 확신을 갖고 있던 자신의 직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과 땅 사이의 중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세기에 걸쳐 반복되어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오푸스데이에 처음 참여했던 젊은 사람들은 그들의 재능을 하느님의 손에 맡겼고,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꿈을 꾸세요, 당신의 꿈은 부족해질 것이다.” 아니면 교황님이 철야 기도에서 청년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꿈을 축복하시길.”[7]

예수님의 부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봉사하고, 충만으로 가득 차 젊은 남성과 여성 개개인에게서 최고의 능력을 이끌어냅니다. 우리가 베드로에게서 보았듯 말이죠. 우리 또한 그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신뢰 하는지를 발견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 말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요한 묵시록 2:17)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루카스 부크 신부


[1] 호세마리아 성인, 밭고랑 No. 290, 하느님의 친구들 No. 206: “열정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대화중, nos. 113ff.

[2] 프란시스코 교황의 세계 청년의 날 기도중, 2016.6.30

[3]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일반 알현, 2006. 5.17

[4] 가톨릭 교리서 No. 936

[5] 호세마리아 성인, 밭고랑 No. 32

[6] 호세마리아 성인, 밭고랑 No. 964

[7] 프란시스코 교황의 세계 청년의 날 기도중, 2016.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