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으로부터 (2022년 3월 19일). 충실함에 대한 사목 교서

이 교서에서 오푸스데이 단장은 성 호세마리아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와 받은 부르심에 충실하게 된 몇 가지 결과에 대해 묵상하십니다.

2022년 3월 19일 사목 교서 (pdf)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을 잘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실 하십시오, 그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1. 옛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표현으로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우리에게 충실 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나는 가끔 팜플로나의 여름 코스에서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모임을 했던 1963년 8월 23일을 기억하곤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면서 낮은 목소리로 성실 하십시오, 그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하고 반복하시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의 생생한 경험에서 오는 즉흥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오푸스데이를 앞으로 진행시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일,많은 고통, 많은 어려움 그리고 동시에 많은 기쁨! 충실함은 고통과 함께 일지라도 필연적인 기쁨입니다. 우리의 힘이신 주님 안에서 기쁨입니다(느헤 8:10).
  2. 모든 특별한 표현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거룩함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성실함이 항상 첫 발을 내딛는 관계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실하십니다(2테살 3:3, 1코린 1:9). 우리의 성실함은 하느님의 성실함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 스스로의 말씀에 성실한 하느님이십니다.”2
  3. 충실함은 특별히 노력과 고통이 수반될 때 나타납니다. 여기에 또한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본보기가 우리를 깨우칩니다. “평생동안 지속되는 일관성만을 성실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수태고지에서의 순종은 십자가 발치에서 반복되는 침묵의 순종에서 그 완벽함을 발견합니다.”.5
  4.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일치는 눈에 띄게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람들의 교회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교회는 성사의 역할을 합니다: 특별히 교회는 성체를 만들고 성체는 교회를 만들기 때문에 모든 구원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5.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 안에서 충실함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복자 알바로 주교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974년 2월 19일, 복자 알바로가 마침 그 자리에 안 계실 때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그분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는 그를 닮고 싶습니다,무엇보다 그의 충성심을… 그는 항상 미소 짓는 얼굴과 비길 데 없는 충성심을 갖고 있습니다.11 나는 종종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vir fidelis multum laudabitur 생각합니다, 성실한 사람은 높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Prov 28:20). 그것은 돈 알바로께서 사무실로 수년간 사용하던 “빌라 벳치아”[오푸스데이 본부 한 구역의 이름]의 문설주에 새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6. 여러가지 형태로 또는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거룩함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사도적인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과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분리할 수 없듯이 내적인 삶과 사도적인 삶을 불리할 수 없습니다.12
  7. 우리의 아버지처럼 열정적으로 세상을 사랑합시다. 14 라는 숫자는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속된 마음을 배제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만 세속적인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가난의 정신과 실천적인 현실을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를 수많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우리를 확신시켜 주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2-23). 오늘날 그리고 항상, 냉철하고 꾸밈없는 삶의 증거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모해야 합니다.
  8. 우리 개개인의 삶에는 때때로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안에서 그분과 함께 우리의 사도적인 사명이 가족, 직업, 우정,사회적인 의무 등 우리의 모든 일상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주된 ‘설정’입니다,”17돈 하비에르 주교님께서는 그의 첫번째 편지 중 하나를 통해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자선의 두 가지 교훈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초자연적인 삶의 확실한 징표인 형제애로 우리는 스스로 충실함을 쌓고 다른 사람의 충실함을 더욱 즐겁게 만듭니다: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3:14).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형제애를 권장하셨는지!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여! 서로 섬기는 일에 정성을 쏟으십시오. 우리의 애정이 예수님의 가장 신성한 마음과 성모님의 가장 달콤한 마음을 통과할 때 형제애적 자선은 그 모든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힘을 갖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짐을 견뎌내고,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운 투쟁을 보장해줍니다. 그것은 우리를 묶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날개를 더 높이 날도록 강하게 해 줍니다.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형제애적 자선은(1코린 13:5) 우리가 기쁨과 희생정신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합니다.
  10.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에서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개인적인 충실함은 제도적인 충실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기관으로서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의 영속성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창설자 성인에 의해 전달된 것입니다.
  11. 이러한 창의성은 역동적 충실함 또는 창조적 충실함이라고 우리가 종종 말하는 버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충실함은 변화에 대한 피상적인 열망과 어떻든 새롭게 보이려는 또는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에 제약을 받지 않는 선험적(priori)인 태도를 모두 배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통하여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각 시대의 발전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회적인 삶안에서 바로 혁신의 출발점에 임하고 있습니다.24
  12. 개인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인 충실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의 개인적인 충실,모든 사람들의 센스와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역사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우리는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의 연속성을 책임감 있게 이룩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근원에 충실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적합한 과거,현재, 미래 사이에 있는 필수적인 연속성입니다. 2015년, 돈 하비에르 주교님께서는 호세마리아 성인께 청하면서 우리를 격려하셨습니다.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는 2028년 10월 2일에도 우리의 아버지께서 1928년 10월 2일에 가졌던 것과 똑 같은 힘과 생생함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실함은 다양한 의미가 있는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무엇인가를 행할 때의 정확성 또는 진실성,” “텍스트의 정확한 복사,” “의무와 약속의 정확한 이행,” 등 말이죠. 그것은 특별히 인간적으로 가장 심오한 측면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충실함을 고려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의 충실함은 사랑이라는 이름입니다.”1 진실한 사랑은 원래 영원합니다. 비록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실패할지라도 그것은 충실한 것입니다.

충실함은 모든 사람의 지능, 의지, 감정, 관계 기억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삶의 전체적인 차원을 포용합니다. 이 짧은 사목 교서에서,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를 시작하고 10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잠시 멈추고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지도해주신 구절들을 가지고 몇 가지 측면에서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소명에 충실함,그리스도께 충실함

비록 우리의 개인적인 나약함이 가끔 우리를 작은 일 또는 큰 일에서 우리를 완전한 성실함으로 이끌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성실함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충실함은 하느님의 자비로 방탕한 아들의 길을 따르는 것에 있습니다(루카 15:11-32).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함은 지속적인 각성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힘을 믿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발걸음까지 우리는 항상 투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3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과의 일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 가족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예수님과 일치를 찾고 발견해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성사 안에서, 속죄와 기도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데, 특별히 개인적인 영적지도 안에서 도움을 받습니다.우리의 마음을 진심으로 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성장해가는 길에서 격려와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감사합시다. 우리의 사랑이 자양분이 되는 곳에서 우리의 성실함은 힘을 받습니다. 사랑에 빠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 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4

하느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성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와 사랑, 사람과 세상을 보는 방식이 점점 그분의 것이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식하에 우리의 변화에 기쁨을 가져오는 영구적인 시작 그리고 또다른 시작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의 길을 따라 나아갈 수 있습니다.6 그래서 필립비 사람들을 향한 바오로 성인의 간곡한 권고는 우리 삶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 2:5)

교회는 약하고 결점이 있는 남성과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들은 교회를 위한 우리의 사랑을 감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을 항상 명심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안에 계십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 인간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계시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매일의 크고 작은 투쟁에서도 그 분의 끊임없는 도움이 우리를 지탱해 주십니다.7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충실함은 교회에 대한 충실함과 같습니다. 교회안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 특별한 방법으로 주교님들과 로마 교황님의 결합을 실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믿음과 친교(communion)의 일치는 가시적인 원칙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갈망이 우리 각 개인안에서 항상 살아있기를: 베드로사도와 함께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Omnes cum Petro ad Iesum per Mariam!)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충성은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에서 진정한 우리의 아버지이셨던 그리고 아버지 이신 호세마리아 성인으로부터 받은 영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에, 우리의 소명에 대한 충성을 수반합니다. 성인께서는 오래 전에 자녀들에게 보낸 한 편지에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위의 모든 아버지로서 삶을 이어가시는 하느님께’(에페 3:15-16) 드리는 감사안에서 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것에 실패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인 부성을 나에게 주신 것은 그 분의 은총으로,오직 이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합니다.8 호세마리아 성인의 충실한 딸들과 아들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의 충실한 딸과 아들이 되는 우리의 소명 경로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신 다른 말씀들을 분명히 기억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믿음, 순결, 소명에 대한 신성불가침, 굳건함,순결, 기쁨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는 충실함을 요구합니다.9여기에서 잠간 멈춰서 기쁨을 강조하겠습니다. 우리의 충실함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이며 기쁨과 함께 좋은 유머로 살아갑니다. 그분께서 하신 다른 말씀들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인간적인 면에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자유와 좋은 유머를 위한 사랑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습니다.10

나 또한, 첫머리에 언급되었던 우리 삶에 가치 있는 소중한 증언을 남겨주고 우리보다 앞서간 사람들, 많은 여성과 남성들의 하느님을 향한 성실함에 감사드리면서 나의 마음을 들어 올립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에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애정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애정은 잠시동안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 하다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적용됩니다. 이 분들 중에 상처받은 적이 있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청합니다.

사도적인 충실함

모든 시대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눈에 띄는 세상에는 엄청난, 종종 무의식적인 하느님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예언의 말씀들은 언제나 실현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아모 8:11)

우리는 얼마나 자주 호세마리아 성인의 간곡한 권고를 묵상해 왔는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한 촉구를 하십니다. 그 분께서는 다시 들어 올려 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아닌 모든 인간 활동의 영광속에서 모든 것을 그 분께로 끌어 들일 것입니다 (요한21:32).13

이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무신론, 무관심,상대주의, 유물론적 자연주의, 쾌락주의 등-요한 성인의 경고가 떠 오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1요한 2:15). 이것은 세상에서 하느님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며, 요약하면 삼중의 욕망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선합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이다 라는 현실과 직면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기뻐하고, 우리 시대의 도전에 관여합니다.동시에, 우리는 세계의 상황, 특별히 전쟁의 슬픈 현실과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고통받는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 특히 가장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절실히 통감합시다. 그러나 저의 주장은 비관론에 굴복하지 말고 복음의 생명력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6)- 그것은 믿음안에서 기도, 고행, 성체성사!그리고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입니다.그러면 우리는 희망찬 세상을 유지할 것입니다.

믿음은 충실함의 기본입니다. 인간의 능력에 대한 헛된 믿음이 아니라 희망의 근간인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히브 11:1).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근간이십니다: 하느님은,그냥 어떤 신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갖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하느님,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온 인류를 사랑하신 하느님이십니다.15

우리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 봅시다: 만일 여러분이 성실하고 침묵과 겸손한 헌신의 열매로 충만하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손으로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루카 성인에게서 되새겨지는 구절입니다: ‘일흔 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자신의 소명과 일상에 충실함

일상의 사건에서 우리의 주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가 종종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은 것과 작은 것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루카 16:10). 작은 일에 성실하면 하느님께서 큰 기쁨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 25:21).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은 “작은 것안에서” 충실함이라는 것이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와 반대로,사랑에서 작은 일에 대한 인내심은 영웅적인 행동입니다.18 인간의 모든 노력에 큰 가치를 두는 것은 사랑입니다. 충실함이라는 것은 사랑의 헌신에 성실한 것이며 자유의 궁극적인 의미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영적인 자유는 우리에게, 심지어 그 사랑을 위한 희생이 수반될 지라도, 해야 할 일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확신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매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거나 또는 어려움 자체가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노동은 결코 부담스럽지 않습니다.”19

우리는 일상생활의 일자리에서, 여러가지 부분에서 개인적인 양심성찰 가령,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 일안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 일과 함께 거룩해지는 것 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21저는 지금 어떻게 하면 일을 기도로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묵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일하는 동안 약간의 경건함 만을 포함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다시 읽어 봅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일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습니다: laborem manuum mearum respexit Deus (창세 31:41), 하느님께서는 제 손의 고통을 보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거룩하고 그것에 걸맞아야 합니다: 마지막 일의 세부사항까지 완성할 뿐만 아니라 도적적인 정직함, 사심 없는 마음,충성과 정의로움으로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전문적인 일은 정직하고 거룩할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기도가 될 것입니다.22

우리는 일을 하면서 종종 한계와 결함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하는 모습을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바오로 성인께서 우리에게 강조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안에서 너의 노력은 헛되지 않으리라(1코린 15:58);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은 없다 고 요약하셨습니다.

오푸스데이와 함께하는 삶안에서 영구적인 것과 바뀔 수 있는 것

2016년,돈 하비에르 주교님께서는 우리에게 호세마리아 성인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인간이 어린시절, 청소년기, 청장년기 등 다양한 성장단계를 거치는 동안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발전에도 진화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죽었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핵심은, 정신적인 변화는 없지만, 표현과 행위의 양식은 항상 낡고 새로우며 항상 거룩하게 진화합니다.23

이 텍스트에 대한 코멘트를 하자면, 저는 당시에 그것이 무엇보다도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 사도직의 영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방향에서 직업, 제도, 인간 구조 등을 지도하는 영역으로, 많은 사람들과 성실한 우정을 쌓고 복음의 빛을 사회에 비추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과 진솔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진취성과 창의성을 적용하려는 노력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진취성과 창의성은 또한 우리가 새로운 사도적 활동을,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의 정신이 우리에게 내어놓는, 해안가 없는 바다에서 활동을 추구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갈망을 이해하고 공유해야 하며 동시에 어떤 페션이나 습관에 지신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통용되는 흐름이나 널리 퍼져 있을지라도,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의 인간적인 톤과 가족적인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설자 성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신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에 맞출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 발전(human progress)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왜냐면 우리는, 아니 오히려 여러분, 나의 딸과 아들들이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에서 이러한 발전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입니다.25

전체적인 하느님의 일(가령, 영적인 형성 방법: 서클, 묵상, 피정 등)을 위하여 의사 결정을 할 경우에 가능한한 변화의 적절성을 분별하는 것은 당연히 총회와 중앙 자문위원회에서 아버지의 궁극적인 책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게다가, 이런 수준에서의 모든 변화가 우리의 정신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신중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열망과 함께 진취적이고 단결된 정신으로 -노 젓는 것을 멈추지 않고- 사도들을 지도하는 사람들에게 사도직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를 수행하는데 있어서“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힘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합니다.” 26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와 함께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보셨던 것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나는 수세기에 걸쳐 투사된 오푸스데이(하느님의 일)를 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젊고,우아하고, 아름답고, 열매 가득히 하느님의 평화를 수호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개인, 가족과 교회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족상잔의 증오와 불신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믿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fortes in fide(1베드 5:9), 그리스도의 자비로 모든 상처에 가장 달콤한 향유를 바르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27

우리의 충성에 대한 변함없는 갱신을 우리의 성실하신 어머니 동정 성모님과 성 요셉께 맡기면서 모든 사랑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Fernando Ocáriz

로마, 2022년 3월


  1. 베네딕토 16세 교황, 12 May 2010.
  2.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15 April 2020.
  3. 교서 28 March 1973, 9.
  4. 길, 999.
  5. 성 요한바오로 2세,강론, 26 January 1979.
  6.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64.
  7.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131
  8. 교서 6 May 1945, 23.
  9. 교서 24 March 1931, 43.
  10. 교서 31 May 1954, 22.
  11. 성 호세마리아, 가족과 함께 노트, 19 February 1974.
  12.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122.
  13. 지시(Instruction), 1 April 1934, 1.
  14. 대화(Conversations), 118.
  15. 베네딕토16세 교황 회칙 Spe salvi, 31.
  16. 교서 24 March 1930, 23.
  17.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주교, 사목교서, 28 November 1955, 16.
  18. 길, 813
  19. 성 아우구스티노, De bono viduitatis, 21, 26.
  20. 교서 14 February 1974, 23.
  21.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45
  22. 교서 15 October 1948, 26.
  23. 교서 29September 1957, 56
  24. 교서 14 February 1950, 21.
  25. 교서 9 January 1932, 92.
  26.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주교, 사목교서, 28 November 1995, 11.
  27. 교서 16 July 193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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