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사순 제4주일, 즐거워하여라 주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후략-


묵상


어떤 사람들은 고통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처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사람이 눈이 먼 것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예수님께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통은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 남자의 고통의 ‘목적’은 “하느님의 일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통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처벌이 아닙니다.

고통은 그분의 최초 계획의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이용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곳에 계시며 우리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상기시켜주는 하느님의 확성기와 같습니다.


한 작은 소년은 맹장염 수술을 하고 나왔습니다.

수술을 받으러 가기 전 통증을 느끼면서 소년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왜 하느님께서 제가 이렇게 아픈 것을 허락하셨어요?

그 신중한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네가 병원에 와야지, 의사 선생님이 너를 치료해줄 수 있단다. 만약에 네가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무언가 네가 잘못되었다고 알기 전에 너는 감염되어서 죽었을 것이란다.”

통증이 우리 몸의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표시이고 그로인해 도움을 찾도록 우리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세상에서의 고통은 우리에게 죄의 결과로서 무언가 잘못 된 것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가 도움을 위해 하느님께 가도록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일이 우리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입니다.


틀림없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면... 고통을 없애주셔야 한다고 논쟁할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고통을 없애주시지 않으실까요? 생각해봅시다:

교사들은 그들의 모든 학생들에게 수업 첫날에 ‘A’ 학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날은 자율학습시간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을 이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물론, 그 누구도 아무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A’학점에 행복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좋은 점수가 그들의 노력의 결과라면 그 학생들과 부모들은 그 학점에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눈 먼 사람은 어둠속에서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기쁨으로 압도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주변에 있는 항상 볼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기쁨의 뿌리들은 십자가의 형태 안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ʺNo pain, no gainʺ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좋은 말입니다.

이 고통은 기쁨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의 원천이신 거룩하신 마리아여, 결코 저의 기쁨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주소서.


I pray 번역 원문 : Jorge Boronat 신부

번역 : 정 대영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