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오의 거룩한 복음.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묵상

요한은 죄의 감형을 위한 속죄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듣기위해 또 이 보속의 표시를 이행하기 위하여 무리지어 이 정화예식 이후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 중 한명으로서 오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분께서는 사실 용서를 받을 죄를 지니고 있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렇듯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의 행동에 당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마태 3:14).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태 3:15). 그 당시 유다교 문화적인 배경에서 “의로움”은 토라를 통달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인, 유다교 신자로 보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하느님의 뜻을 조건없이 받아들인 표시로써 받으셨습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그 깊은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의 지상 인생의 끝 즉,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서 명백하게 보여집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오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계획인 사람들을 천국의 약속된 고향으로 데려가는 본인의 역할을 명백히 수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의 물에서 나오면서부터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똑같은 강을 건너기 전에 네보 동산에서 약속된 땅을 관상한 후에 죽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인생의 마지막 장소였던 요르단을 떠나시면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모세가 시작한 일을 진실로 수행하려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신호로써 너무나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인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구절은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 22:2). 하고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의 그 하느님 말씀의 메아리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에 나오는 그 극적인 장면(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뜻을 저항하지 않고 그의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가는 장면)과 골고타의 장면(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심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완벽하게 평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다.” (이사 42:1) 라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에서 주님의 종의 찬송가의 도입부를 회상시킵니다. 주님의 종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이 찬송가의 4절에서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이사 53:4-5).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이미 그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례’를 미리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기’(마태 3,15) 위하여 오신다. 곧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신다. 몸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죽음의 세례를 받아들이신다. 이러한 수락에 성부의 목소리가 당신 아들이 마음에 든다고 응답한다. 예수님께서 잉태 때부터 충만하게 지니셨던 그 성령께서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한 성령의 원천이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마태 3,16), 예수님과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물이 거룩하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다.“[1] 라고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이 순간부터, 가장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과 성화의 움직임은 예수님의 삶(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안에서 더 분명하게 보여 질 것입니다.

[1] 가톨릭교회 교리서 536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