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로…
1957년 5월 4일 강론
139. 이번 오월 한 달 동안에는 이 세상을, 하느님의 백성들을 눈여겨봅시다.[1]그러면 오래된 형식으로, 또는 새로운 형식으로 다양하게 치러지는 수많은 유형의 성모 공경 행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크나큰 사랑을 담아서 거행됩니다.
이러한 성모 공경 행사들이 언제나 생기 넘치며, 그리스도인들 마음에 “하느님의 한 가족 (domestici Dei)” (에페 2,19)으로 행동하겠다는 초자연적인 열망을 일깨워준다는 사실은 저를 매우 행복하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정 마리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보면,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의 일원임을 보다 확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과 더욱 가까운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족의 재회(再會)같습니다. 따로 살던 장성한 자녀들이 어떤 가족 기념일을 맞아 어머니를 뵙기 위해 집에 돌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설령 식구들 간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날만큼은 달라지는 거죠.서로 하나됨을 느끼고 가족으로서 똑같은 애정을 나누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교회를 세우시며 서로 함께하도록 돌보십니다. 성모님을 공경한다면 교회라는 신비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더 가깝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의 가시적인 지도자인 교황과 더욱 일치감을 갖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곧잘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모두 성모님을 통해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우리 스스로를 교회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믿음 안에서 우리 형제들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가 모든 인류와 한 형제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파견됐기 때문입니다.[2]
저와 여러분의 경험이 우리의 성모님께 대한 진심 어린 공경의 효과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1935년 스페인의 ‘손솔레스 성모성지’를 방문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순례는 아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방문도 아니었고 무슨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성지에 갔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세 명이 일행의 전부였지요. 저는 성모님 공경을 위한 공식적인 행사들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혼자 또는 소수의 인원이 성지를 찾을 때도 공식적인 성모 공경 행사에 못지않은 애정과 열정을 성모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식의 방문을 더 좋아합니다. 더욱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듭니다.
손솔레스 성모성지를 방문하는 동안 성지 이름의 유래에 관해 들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그리스도교인과 이슬람교인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 성모상이 숨겨져 있었는데 여러 해가 지난 뒤 목동들에 의해 발견됐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성모상을 보았을 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눈이야, 마치 태양 같아.” 이 외침을 스페인어로 읽으면 ‘손 솔레스’입니다. 그래서 이 성모상을 모신 성지 이름이 ‘손솔레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140. 1935년 이후 저는 여러 차례 성모성지를 방문하는 동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어머니께 가진 놀라운 애정을 떠올리며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애정을 성모님께 대한 사랑의 응답,그러니까 성모님께 드리는 자녀로서의 사랑이자 감사라고 여겨왔습니다. 즉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드리는 애정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징표와 아주 깊이 연관돼 있으시니까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징표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스스로 우리 인간의 죄와 나약함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당신이 태어나신 거룩한 목적에 충실하심으로써 성모 마리아께서는 인간에게 봉사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투신하셨습니다. 인간은 당신 아들 예수님의 형제가 되도록 부르심 받은 존재들입니다.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머니는 또한 참으로 인간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모님이 모든 인간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래 세대들도 그 사실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요한 성인에게 영감을 주셔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어,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 25-27).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의 삶 속으로 모신온 것이지요. 영성가들은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을,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를 그들의 삶 안에 모시도록 초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확실히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확신에 차서 당신께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당신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보여주소서”라고 간청하며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알고 당신께 호소하길 바라십니다.[3]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간청을 미리 아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알고 계시기에 우리를 돕기 위해서 아주 빨리 오시는 분입니다. 성모님의 손길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성모님이 우리 어머니라고 느낄 수 있는 여러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1. 성모님에 관한 복음 말씀은 그분이 당신 아드님을 한 걸음씩 착실하게 따라가셨던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에서 한 역할을 맡으시면서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시는 어머니인 것입니다.복음은, 성모님에 대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하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어머니의 돌봄으로 살펴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카나의 결혼잔치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시끌벅적한 시골 결혼식 중 하나에 초대받은 하객이었습니다. 여러 다른 마을에서 온 군중으로 붐볐습니다. 하지만 오직 성모님만이 포도주가 동이 난 것을 알아차리셨죠.[4]
그리스도의 삶에서 만나는 이런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해 보이지 않나요?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이처럼 일상적인 일들에서 드러납니다. 여인이, 특히 가정주부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차리고,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작은 일들을 살피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것을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요한이란 점도 눈여겨봅시다. 요한은 우리를 걱정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유일한 복음사가입니다. 요한 성인은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 성모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길 바랐습니다. 오직 요한 성인만 이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님을 누구에게 부탁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성모님을 자신의 어머니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알았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사이의 날들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의 결과로 제자들은 믿음이 충만해진 상태입니다. 그들은 간절하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서로가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사도 1,14)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가장 길게 얘기해주는 복음사가는 루카 성인입니다. 루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데 성모 마리아께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시작에도 성모님이 깊이 관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했고, 그래서 그렇게 긴 설명을 한 듯합니다.
교회가 시작된 첫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을 만났고 어머니와 같은 그분의 보살핌을 경험했습니다. 성모님은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교회의 신자들이 생겨나는 데 협력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교회의 신자들은 성모님이 육신의 실제적인 어머니이신 분, 즉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습니다.”[5]
그래서 마리아께 드리는 이러한 공경의 가장 오래된 증언들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기도라는 사실은 결코 놀랍지 않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소서.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6]
142.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어머니께 얘기하고픈 바람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머니시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성모님을 살아계신 누군가로 대하고자 합니다.왜냐하면 죽음도 그분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안에서 육신과 영혼으로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또한 그분께 이끌리며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신학적 논리에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비록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님이란 진리가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신비이지만 말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징표로 여깁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부르십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보잘것없는 먼지 같은 존재지만,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서 약동하심으로써 우리는 죄로부터 놓여나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담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이 지혜나 구원을 우리가 이뤄낼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직 이행되지 않은 약속의 단계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이미 우리 안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더 이상 고통스러운 어둠 속에서 울부짖으며 빛을 갈구하는 눈 먼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자녀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따뜻함과 보호하심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계신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속에 곧바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 개개인과 어머니와의 관계를 짚어보면, 감미로운 이름의 성모 마리아를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를 사랑하듯,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다른 가족들, 그리고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똑같은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아들, 딸들이 어머니를 어떻게 대합니까?물론 조금씩 다르겠지만, 항상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대하지 결코 냉정하게 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아주 친밀한 모습이 어머니를 대하는 평범한 아들,딸들의 태도이겠지요. 만약 그렇게 평범하지만 친밀한 행동들, 예를 들면 집을 들고 날 때 하는 입맞춤이나 포옹이라든지, 조금 특별한 관심,그리고 몇 마디의 따뜻한 말 같은 것들이 없다면 어머니는 마음이 상하실 것입니다.
천국에 계신 우리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우리들 각자의 어머니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카풀라를 입는 관습을 갖고 있습니다.[7]또는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에, 그리고 많은 공공장소에 걸린 성화(聖畵)에 인사하는 습관도 있습니다.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인사지요. 그리스도인들은 또 묵주기도를 하면서 그리스도 삶의 중요한 사건들을 떠올립니다.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아무리 반복해서 기도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또한 일주일에 하루를 성모님을 위한 날로 정해 성모님을 위해 조금은 특별한 일을 하면서 그분의 모성적 사랑에 관해서 깊이 생각합니다. 주로 오늘 같은 토요일이죠.
제가 여기서 굳이 얘기할 필요 없이 수많은 마리아 공경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 모든 공경 행위들을 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초자연적 삶의 성장은 여러 공경 행위들을 거듭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하지만 그런 공경 행위들 중 어느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한다고 저는 얘기하곤 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공경이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서 성모 공경이 지닌 깊은 의미를 잊어버린 듯이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생겨난 근원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그 근원이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성부의 뜻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실제로 인간이 되셔서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성자에 대한 사랑이며,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시는 성령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에게 성모 마리아를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성모님을 거부할 어떤 권한도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 자녀로서의 사랑과 기쁨으로 성모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143. ‘하느님 사랑 안에서 어린이가 되는 것’이란 주제에 관해 생각해봅시다.그러면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신비는 하느님께 다가가려면 우리가 작아져야만 한다는 진실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오만한 마음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아집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또한 우리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계속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영적 어린이가 되기 위해 여러분은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믿는 것처럼 믿어야 하며, 어린아이들이 애원하듯이 하느님께 애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성모 마리아와의 만남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성모님께 대한 공경은 그저 부드럽고 감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 공경은 우리 영혼을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줍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희망을 주님께 두도록 해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으로 큰 위안과 기쁨을 얻게 되고,우리의 신앙생활이 곧 성모 공경을 의미할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이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3,1-4)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대한 공경은 우리가 영적으로 그분의 진정한 자녀가 되도록 가르쳐줍니다. 성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첫 번째 방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으로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복잡한 문제들은 항상 자기 자신만을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 발생합니다.세 번째는 그 무엇도 우리의 희망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여러분 자신을 만나게 되는 길… 그 길의 시작은 성모님께 대한 신뢰 가득한 사랑입니다.”[8]몇 해 전에 저는 묵주기도에 관해서 쓴 소책자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이 말의 진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저는 이 생각을 여기서 결론짓지는 않겠습니다.저는 여러분 스스로 이 말의 진실을 발견하도록 초대합니다. 성모 마리아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내보이고, 그분을 향해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을 성모님께 털어놓으며, 여러분이 스스로 깨달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분께 간청함으로써 말입니다.
144. 만약 여러분이 성모 마리아를 만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마음 깊이 품으신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권능과 위엄을 버리신 분입니다.[9]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뛰어넘으셨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이 필요로 하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사랑으로부터 온 것입니다.그 깊은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인간의 육신을 취하게 하고 우리들 죄의 무게를 감내하시게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신앙의 진실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때까지 우리 영혼을 그 신앙의 진실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그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삶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들에까지 관심을 가지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일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들 한 명 한 명을 지명(指名)하여 부르고 계십니다.[10]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이러한 확실성(確實性)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빛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비록 모든 것들이 예전과 똑같이 그대로이더라도, 우리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로 바뀌고, 결코 끝나지 않을 평화와 유머로 가득한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감사의 행위가 됩니다.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9)
우리의 기도도 성모 마리아께서 드린 이 기도와 함께할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의 기도를 흉내낼 수도 있습니다.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노래하고 찬미하고픈 열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인류와 모든 창조물들이 우리의 기쁨을 더불어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서로 형제처럼 느끼게 해주십니다
145. 만약 우리가 성모님과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만 생각하거나 우리만의 문제에 골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이기적인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께 데려가 주실 것입니다.예수님은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 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 8,29)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보편 교회와 모든 영혼의 구원을 걱정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영적 쇄신에 관해 염려하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사도직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 교회의 선함을 주시하면서 우리의 내적 생활과 그리스도교의 미덕들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진심어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한 일을 결코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이 우리 안에 스며들면 우리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는 결국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비록 그 대화의 시작은 분명히 개인적 수준의 것일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손을 잡는다면, 성모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우리 형제라는 사실을 우리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그분의 딸이자 배우자이자 어머니이신 분이 성모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의 문제는 명백히 우리의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형제애는 영혼 깊이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양육하셨고 그분의 생애 내내 함께하시다가 지금은 천국에서 그분 곁에 계십니다. 바로 그 성모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차리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우리 앞길을 가로질러 가실 때,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실 때, 바로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146.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 손솔레스 성지를 방문하던 길에 우리는 어느 밀밭을 지나쳤습니다.바람이 불어 흔들릴 때마다 밀은 빛을 발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복음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요한 4,35)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당신 마음속에 품으셨던 것과 같은 갈망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이윽고 저는 길을 벗어나 밀밭으로 가서 밀이삭을 뜯어 기념으로 간직했습니다.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계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그들에게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만의 편협한 세계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우리가 그들을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주 예수님의 자비에 관해 얘기하며,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느끼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합니다. 그분은 나인 고을의 과부를 위로하셨고[11],나자로의 죽음에 슬피 우셨으며,[12] 먹을 것 없이 당신을 따랐던 군중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13]또한 죄인들을 연민하셨고, 빛과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을 가엾어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우리가 진정으로 성모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주님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우리 마음이 넓어져서 부드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 우리 형제들의 고통과 의혹, 외로움과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그들을 돕고 싶어질 것이고 그들에게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대하고, 성모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147. 빛으로 온 세상을 채우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14]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사명은 세상 끝까지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삶을 바쳐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되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인간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이 거룩한 과업을 돕도록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는 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하고픈 마음을 품게 하십시오. 주님을 향해 가는 길에 동행하도록 바라십시오.”[15]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비유를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이 자는 동안” (마태 13,25) 가라지를 뿌리는 이들이 왔다는 그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숱한 경험들에 휩싸여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의 무기력함에 너무도 쉽게 스스로 휘말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세상과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마주하기를 꺼리게 되고 맙니다. 이런 무기력 상태는 아주 나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간을 슬픔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유감스러워해야 할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경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에게 주신 성소의 모든 결실들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함이 부족해서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은총은 그것을 숨기라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고 내려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6]더 열심히 노력하길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됩니다.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기쁨과 평화(平和)에 대한 즉각적인 약속이 함께하는 거룩한 경이로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차려서 관대해지는 방법을 아는 경우에만 그렇습니다.[17]하느님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위험한 잠에 빠진 사람들을 깨워야 합니다. 삶이란 놀이의 대상이 아닌, 우리가 키워내야 하는 거룩한 보물이란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줘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의지와 열망을 갖고 있지만 어떻게 실천하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그 길을 보여줘야 합니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재촉하고 계십니다. 우리들 각자가 한 명의 사도일 뿐 아니라,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사도들 중의 사도가 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불러온 이들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모든 이들에게 알리도록 힘을 북돋울 것입니다.
148.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물어보겠죠. 그리스도에 대한 이 깨달음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러면 저는 아주 자연스럽고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직업 생활에 종사하고 가족을 돌보십시오. 그리고 인간의 고귀한 관심사들을 더불어 나누십시오.또한 모든 사람들의 정당한 자유를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됩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을 제 마음에 심어주셨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여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건 간에 누구나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거룩하게 될 수 있으며 하느님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열망이었습니다.우리 주님께서는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일들을 거룩하게 만들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성은 바로 일상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성모님께서 당신 삶의 거의 모든 날들을 당시의 보통 여인들과 똑같이 사셨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가족을 돌보고 자녀들을 키우며 집안일을 하는 평범한 여인들처럼요. 성모님께서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상적인 일들이 중요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매일매일의 노동,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이웃을 돌보는 일, 친구와 친척들을 방문하는 것 같은 일들을 하찮게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일상의 일들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삶을 한 마디로 설명해주는 것, 그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 그 사랑은 너무도 완벽해서 성모님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성의껏 수행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의 아주 작은 행동조차도 결코 상투적이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모범이자 길이십니다. 우리는 성모님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상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삶의 모범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인간 조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온갖 한계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흔들림 없는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가 자신들과 같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행복해?이기심과 편히 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덕적으로 살며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헌신하도록 누가 당신에게 가르쳐준 거야?’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의 거룩한 존재적 비밀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에 관해 그들에게 얘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영혼에 쏟아부어주신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려주기 위해 우리의 초라한 언어를 사용할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149. 요한 성인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들을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꾼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그것이 성모님 말씀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뵙고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묻도록 하신 것뿐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란 거대한 가르침의 과업입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이고 개인적이며 충실한 사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지평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우면서도 솔직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신앙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본보기를 통해, 거룩한 진실의 힘이 넘치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대담해지십시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도움에 의지하십시오.성모님은 결코 우리의 어머니 되심을 그만두지 않으실 것이므로 당신 자녀들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임무와 마주하도록 해주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의 삶을 묵상하는 이들에게 항상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그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이끌어 주시고 성자의 모범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에 데려가 주십니다. 이러한 만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정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이 여러분과 저처럼 더 젊은 형제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맏아들과 화해를 이루도록 전구(轉求)해주십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를 온전히 당신께 내어드리려는 수많은 회개와 결심들 이전에 성모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변화를 열망하며,새로운 삶에 나서도록 북돋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부하신“무엇이든지 그(예수님)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라는 말씀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헌신과 그리스도교의 성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모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개인적 삶을 밝혀주십니다.
주님 앞에서 나누신 성모님의 이 대화는 우리의 신앙에 진정 새로운 활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분께 대한 공경과 사랑에 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5월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잘 이용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말입니다. 일상의 작은 일과 작은 배려들을 통해 당신 자녀인 우리가 성모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성모님께 보여드리도록 애씁시다. 우리의 거룩함과 우리의 사도직이 무언가를 실제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시는 구원사업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가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성모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성모 마리아, 저희의 희망, 하느님의 종, 상지(上智)의 옥좌(玉座) 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Sancta Maria, spes nostra, ancilla Domini, sedes Sapientiae, ora pro nobis!)
[1] 1베드 2,10 참고.
[2] 마태 28,19 참고.
[3] 성가 ‘바다의 별이신 성모 (Ave maris stella, Monstra te esse Matrem.)’ 중에서 인용함.
[4] 요한 2,3 참고.
[5]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거룩하신 동정녀 ( De sancta virginitate )’에서 인용함.
[6] ‘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 (Sub tuum praesidium)’에서 인용함.
[7] 스카풀라(scapula-성모성의): 다갈색의 4각형 작은 헝겊 두 장을 끈으로 묶어 목의 주위에 앞뒤로 늘어뜨려서 옷 속에 착용하는 것.
[8] ‘거룩한 묵주기도 (시카고 1972)’에서 인용함
[9] 필리 2,6-7 참고.
[10] 이사 43,1 참고.
[11] 루카 7,11-17 참고.
[12] 요한 11,35 참고.
[13] 마태 15,32 참고.
[14] 마태 5,13-14 참고.
[15] 대 그레고리오 성인 ( St. Gregory the Great, 540-604 )의 ‘복음서 강해 (In Evangelia homiliae)’ 에서 인용함.
[16] 마태 5, 15-16 참고.
[17] 요한 4,10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