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X. 나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 함께 걷는 여정.
사도들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을 바라본 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 청년은 “근심하여 가 버렸다”(마태 19,22 참조). 예수님의 시선은 슬펐다기 보다는 아픈 듯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태 19,23).
베드로는 여느 때처럼 공동체의 마음을 대변하여 여쭈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이 말씀을 되새기듯, 성 호세마리아는 오푸스데이의 어려운 시기에 주님께 친근하게 다가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이제 저희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주님을 믿고 의탁한 이들을 버리실 수는 없습니다!”[149].
나에게는 어떤 길이?
소명의 시작은 언제나 불확실함을 동반한다. 하느님께서 마음속에 불안을 허락하시고, 구체적인 길이 어렴풋이 드러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는다. “이 길이 맞는 것일까?”
그 질문 뒤에 있는 두려움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앞날이 보이지 않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다. 또 삶이 값지고 의미 있게 되기를 바라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신비롭고도 단순하다.바로 우리를 먼저 찾으시는 하느님과, 그분과 함께 살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이다.사실 두려움의 대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무한한 사랑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이 드러날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과연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와 성 호세마리아의 “저희를 어떻게 하시렵니까?”.그리고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이 “주님, 제가 이 길을 가면 제 삶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여쭌다면, 그리스도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시며, 다정하고 기쁨 가득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당신의 ‘내기’로 삼으시며, 결코 지지 않으신다.
삶은 모험이고, 위험이며,한계와 도전이자 노력이다. 자신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 더 큰 무언가에 인생을 바칠 때, 우리는 참된 아름다움과 충만한 행복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시선은 희망으로 빛나며 이렇게 약속하신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크게 주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눈부신 계시처럼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도 존중하신다. “어떤 이가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부르심 때문에 존재의 불확실성 앞에 서게 된다면, 성령께 ‘보게 하소서.’라고 빛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나 함께 분별에 참여하는 이들(영적 지도자 등)이 어떤 객관적 장애도 보지 못하고,하느님의 섭리가 그를 그 자리까지 이끌었다면, ‘보게 하소서.’라고 청하는 것만이 아니라 ‘원하게 하소서.’라고 힘을 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은총으로 높아진 자유 안에서 영원한 소명이 구체적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150].
교회와 함께하는 여정.
소명을 알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교회 안에서 발견되고 자라난다.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고, 교회는 우리와 기쁘게 함께한다.
교회는 끌어당긴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어떤 이들을 통해 깊은 메세지를 남기신다. 그들의 삶과 이상, 가르침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며 이기심을 벗어나 더 충만한 사랑의 삶으로 부르신다. 이는 성령의 역사이다.
교회는 부른다. “하느님은 우리 삶을 복잡하게 만드시려고 허락을 구하지 않으신다. 그냥 들어오시고… 그것으로 끝이다!”[15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시며(루카 14,15-24), 모든 사람이 초대받았음을 가르치셨다. 사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의 초대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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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맞아들이고 함께한다. 모든 소명은 사랑으로 응답할 때 우리를 완덕의 길로 이끈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소명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응답한 소명이다.혼인과 독신, 사제직과 수도생활은 모두 열린 길이다. 선택은 자유에 달려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부르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마태 16,24).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마태 19,21).
그렇다면 왜 어떤 이는 특별히 이 길을, 또 다른 이는 저 길을 택하는가? 자유는 더 크고, 더 거룩한 사랑을 향하기 때문이다.성 이냐시오 안티오키아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위대함의 문제이다.”[152].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단순함만으로도 영혼을 끌어당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 참조)는 말씀처럼, 우리도 알지 못했던 우리의 깊고 신비로운 내면이 그분의 초대에 응답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했듯이, “비슷한 자만이 비슷한 자를 안다.”[153].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진실한 삶은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께로 더 까가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가까이에 있는 그들은 성덕의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나도…” 이것이 바로 복음의 초대이다. “와서 보시오.”(요한 1,46).
함께하는 식별.
소명을 식별하는 데에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의 도움, 또 교회 제도의 식별이 필요하다. 교회의 사명은 각자가 제 자리를 찾도록 돕는 것이기도 하다.
삶을 계획할 때, 신뢰할 만한 이들에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은총이다. 그들은 우리를 잘 알고, 양심 안에서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다. “용기를 내라. 너는 이 사명을 위한 조건과 은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네 소명일 수 있다.정말 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혹은, “어쩌면 이 길은 네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명은 언제나 모두에게 이롭다. 그것은 개인에게도,교회에게도 가장 좋은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각 사람을 사랑의 섭리로 인도하신다.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성덕의 길들을 만드시고, 사람들이 그 길을 살아가도록 돕는다.또한 성령께서는 어떤 이들을 일으켜 교회 안의 이 길들이 생기 있게 한다.
신앙의 도약: 하느님께 대한 신뢰.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사도들은 사람들의 배고픔 앞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에게는 그곳에 있던 한 아이가 가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빵들을 손에 들고 모든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요한 6,12) 하시어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울 만큼 남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삶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인류에게 도움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그러면 그분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고, 그 첫 번째 수혜자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우리 삶의 문을 하느님께 열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그분을 갈망하는 군중 앞에서 그분과 함께 마음이 움직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을 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의식하면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께 완전히 신뢰하면서 말입니다.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시므로, 신앙의 도약이 필요합니다: “왜 한 번에... 진정으로... 지금 당장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는가?”[154].’
물론 일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식별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식별이란 자기중심적 자기분석이나 이기적 성찰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하느님의 신비로 향하는 것이며, 이는 형제들의 선익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 받은 사명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준다.”[155]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성소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고, 안전지대와 개인적 안전함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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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으로 뛰어내리려면 낙하산이 작동하고 펼쳐져서 부드럽게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먼저 낙하산을 펼치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소는 자신의 보장이 아닌 하느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방박사들에 대해 말하면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페르시아에 있을 때 별을 보았지만,페르시아에서 나온 후에는 의로움의 태양을 바라보았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만약 결단을 내려 자기 나라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별을 계속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156]’라고 하였습니다.
별을 보려면 걸어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항상 우리의 생각를 넘어서고, 우리 자신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너의 길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어둠 속에 머물러 있어서 분명하지 않다는 것도.-언제까지 결정을 미루려는가?”[157]’.
오직 길을 선택해야만 그 길을 걸을 수 있고, 선택한 것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을 신뢰해야만 우리가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처음에는 할 수 없습니다: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려면 믿어야 합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나와 함께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적인 깨달음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청춘을 보내는 사람의 잘못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존재하는 특별한 한계도 여기에 있습니다:셀카를 너무 많이 찍고, 너무 많은 사진에서 자신을 보다 보니 아마도 자신을 이미 완벽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이라는 신비를 가진 모든 것을 말입니다.정체성을 찾기 원한다는 것은 이 신비를 발견하고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맡기는 것이며, 우리가 포용할 수 없는 논리와 이유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야기는 조금씩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는 신뢰의 길은 가장 큰 꿈들, 하느님의 꿈들을 실현하게 됩니다. 착한 자녀들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로마 8,14 참조), 우리의 삶은 날아오르게 됩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길이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소녀 마리아의 길이고, 하느님께서 아버지로 받아들이신 목수 요셉의 길입니다; 처음의 동요와 실수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기둥이 된 사도들의 길이며...; 우리보다 앞서 가고 우리와 함께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길입니다. 그들의 삶이 시작될 때 누가 그 신비를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오직 마지막에만 명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가능한 것은 각자 자신의 거짓 안전함에서 벗어나 하느님 아버지의 든든한 팔에 뛰어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158]’.
그래서 식별이 진전되고, 구체적인 성소가 분명한 윤곽을 갖게 될 때,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앙의 첫 도약, 즉 '예'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필요합니다.식별은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수세기에 걸친 지혜로 각각의 성소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일련의 단계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도와 주며, 더욱 헌신의 길을 걷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의심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의심하며, 그래서 그분과 교회를 신뢰합니다.
우리 편에서는 탈렌트의 비유에서 설명하는 것처럼(마태 25,14-30 참조) 우리가 무엇이고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고려하여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하며; 거래하지 않고 나누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이것이 성숙하고 진실한 결정의 열쇠입니다: 완전히 자신을 내어주고,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완전히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려는 자세와, 이러한 봉헌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우리를 채운다는 확신입니다. 이렇게하여 우리는 우리의 길을 찾았다는 깊은 확신이 우리의 삶에 뿌리내릴 수 있게됩니다.
자신의 성소를 식별하는 순간에 마리아는 천사에게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이하 참조).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는 전달자이자 중재자입니다. 마리아는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않지만, 올바르게 하기 위해 묻습니다. 천사가 확신시켜 주는 것 앞에서: 성령께서 하실 것이라고, 왜냐하면 내가 전해준 것이 너를 넘어서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37절).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조차도 묻는다면, 각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사랑의 내적 감동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어떻게 해야 주님께 제 삶을 바칠 수 있을까요? 제 행복을 위한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빛나는 자유와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서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조언을 받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기 위해: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소서.)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파블로 마르티 신부
[149] A . 바스케스 데 프라다, 오푸스데이의 설립자, 제3권, Rialp, 마드리드 2003, p. 33
[150] F. Ocáriz, “교회 안에서 오푸스데이성소로서의 오푸스데이 성소”, 교회 안의 오푸스데이, Rialp, 마드리드 1993, p. 153.
[151] 성 호세마리아, 담금질, n. 902.
[152] 성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n. 3 (PG 5, c. 690).
[153] 아리스토텔레스,영혼론 I, 2.
[154] 성 호세마리아, 길, n. 902.
[155] 프란치스코,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19-III-2018), n. 175.
[156]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VII. 5 (PG 57, c. 78).
[157] 길, n. 797.
[158] 성 호세마리아, 십자가의 길, 제7처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