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사랑에 응답하기: 혼인 성소
성 호세마리아가 혼인 성소를 말하기 시작한것은 거의 한 세기 전의 일이었는데, 이 두 개념의 결합은 당혹감과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날개 없는 새를 또는 네모난 바퀴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혼인 성소'가 있다고 말하니까 웃는 건가요?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성소가 있다:그렇다, 성소 말이다."[107]
그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또는 오늘날에도, '성소를 갖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해 평범한 삶을 떠난다는 의미였다. 어떤 식으로든 일상을 떠나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이란 가족과 자녀, 가정,직장, 쇼핑, 청구서 처리, 세탁기 돌리기,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한 경험, 웃움,형제들 간의 다툼, 응급실에서 오후 보내기, 냉장고에 남은 음식 보관하기 등의 것이었다.
삶 자체와같이 다양하고 예측 불가능한 무수한 것들은, 혼인 성소라는 불가능한 것 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가능한 최고의 모습을 찾는다. "혼인의 성소적 의미"는[108] 정확히 하느님이 가정 생활의 평범함을 축복하시고 그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당신은 거룩하시며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거하십니다"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시작하신 시편이 말한다(시편 22,4). 거룩하신 하느님은 가정의 지극히 평범한 삶 한가운데 살기를 원하신다.임시 거처인 우리 삶의 모든 "제작 결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당신을 찬양하며 천국으로 변화되도록 부름받은 삶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루도 빠짐없이 크든 작든 비밀을 하나씩 잡아서 너의 삶이 매일의 발견이 되게 하라. 하느님이 너에게 주시는 딱딱한 빵 부스러기마다, 너는 너의 영혼의 가장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바쳐라."[109]
좋은 여행 되시기를
한 젊은이는 혼인 성소에 대한 말을 듣고 웃었지만,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도발"은 한 조언과 함께했다: "성 라파엘에게 의탁하라. 그가 토비야를 인도했듯이 너를 순결하게 길 끝까지 인도하시도록."[110] 성 호세마리아는 성경에서 이 대천사를 설명하는 유일한 이야기를 암시했는데, 그는 이 대천사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애정이 너무나 깊어서 일찍부터 젊은이들의 사도직을 그에게 맡겼을 정도였다.[111]
"토비아서는 매혹적인 책이다"[112]라고 그는 한번 말했다. 책의 모든 이야기가 여행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실제로는 두 가정의 삶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세 번째 가정의 탄생을 목격하게 한다. 그리고 여행 자체도 가정적인 분위기인데,수세기 동안 예술가들의 눈에 띈 한 세부사항이 있다: 이 책은 또한 성경에서 가정 견이 나오는 유일한 곳이기도 한데, 그 개는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토비야와 성 라파엘을 동반한다. (토비 6,1; 11,4 참조).
토비야가 떠날 때, 그의 아버지는 이런 말로 그를 축복한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너희를 보호하시고 건강하게 돌려보내 주시기를.그분의 천사가 너희와 함께하며 보호해 주시기를"(토비 5,17). 성 호세마리아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축복을 할 때 이 말을 구체적으로 인용했다: "주님이 너의 길에 함께하시고, 그분의 천사가 너와 함께하시기를."[113]여행 -진정한 여행, 가장 결정적인 여행-은 삶의 길이며, 혼인에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길이다.세상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하느님의 꿈에 응답하면서 말이다[14]. 그러므로 젊은이들을 깨우쳐주고 또한 많은 여행의 시간을 돌아본 후에 다시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루는 성소의 아름다움"을[115]: 이류가 아닌 일류의 성덕에 대한 부름을.
진정으로 삶이 시작될 때.
개인성소는 단순하지만 가득 찬 결과의 발견과 함께 깨어난다: 우리 삶의 의미, 진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것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사는 것에 있다는 확신 말이다.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바로 그것으로, 사랑을 주는 것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오직 그렇게 했을 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찾을 것이다.
단순히 여가 시간에, 양심을 진정시키려는 듯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우리의 인생 계획으로, 다른 모든 계획들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사라와의 결혼 전후에, 젊은 토비야는 그 방향으로 여러 조언을 받는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한 부름이다. 미래를 대비해 돈을 마련하라고 여행 보내는(토비 4,2 참조) 그의 아버지 토빗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유산을 전해준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을: "너의 어머니를 존경하고, 그가 사는 동안 그를 버리지 말아라. 그를 기쁘게 하고, 그의 마음을 결코 슬프게 하지 말아라 (...). 아들아 음행을 삼가라 (...). 여유가 있으면 가난한 이에게 관대하게 주어라, 그리고 자선을 베풀 때 아까워하지 말아라 (...). 항상 주 하느님을 찬양하고 너의 행실을 인도해 주시도록 그분께 청하라.그러면 네 사업과 계획에서 성공할 것이다" (토비 4,3-19).
몇 주 후, 갓 결혼한 토비야가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 그의 장모 에드나는 이렇게 작별을 고한다: "주님 앞에서 내 딸을 네게 맡긴다. 결코 그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평안히 가거라, 아들아. 이제부터 나는 네 어머니이고 사라는 네 아내다"(토비 10,13).
"그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말라 (...). 결코 그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하느님은 부부들을 서로 보호하고, 돌보고, 헌신하도록 부르신다: 그것이 부부의 개인적 실현의 비밀이고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자아실현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용어의 모든 깊이에서 산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도 그렇게 사셨다.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단순하고 부드럽고 섬세한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고, 무엇보다도 육화하신 생명을 돌보면서 사셨다. 하느님은 그분의 제자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있는 곳마다 그분의 기쁨을, 그분 삶의 열망을 발산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 의식의 핵심이다.
"우리의 도시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신다- 사랑과 미소의 부족으로 사막화되었습니다.많은 오락, 시간 낭비, 웃음을 짓게 하는 것들이 있지만, 사랑이 부족합니다. 가정에서, 특히 가정에서 말입니다! 아빠,엄마가 일하고 아이들과 함께... 한 가정의 미소는 우리 도시의 사막화를 피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가정 사랑의 승리입니다. 어떤 경제적, 정치적인 것도 가정에 이러한 기여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바벨 계획은 생명 없는 고층 빌딩들을 세웁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반대로 사막을 꽃피게 합니다."[116]
산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발견은 청소년기에도 가능하지만 때로는 아주 늦게까지 발견하지 못한다. 이러한 발견은 유년기에서 인간적 성숙으로의 진정한 이동을 뜻한다. 그때 사람의 인격이 진정으로 형성 되고, 오직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더 많이, 항상 더 많이 갈망하는 것; 식욕 때문이 아니라 환상 때문에 갈망하는 것이다.
환상은 삶의 신호다; 사랑하는 것,이것이 삶이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줄 수 있을 정도까지 사랑하는 것.자신을 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비어있는 것이다; 죽음의 맛을 느낄 수 없는 이는 이미 죽어있다. 오직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을 잊을 수 있는 ,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한 마디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살아있다. 그 사람은 단지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117]
하나의 '예'는 큰 범위를 갖는다
혼인 성소는 "자신의 만족을 향한 충동이나 이기적으로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려는 단순한 수단"과는 전혀 다른 것이고,그것은 빛으로부터 나타난다[118]. 의심할 여지없이, 인격은 오직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나타난다. 혼인 생활은 만족과 기쁨의 원천이다; 그러나 문제, 요구, 실망이 따른 다는 것을 모두가 다 안다. 다 알고 있는데도, 사랑이 소원해질 때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딱딱한 빵 부스러기들을 경멸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상황을 비교하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한편으로,삶에서 하나의 특별한 사건에 심사숙고하는 곧, 가족의 사회적 명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마지막 세부사항까지 심사숙고한 어떤 결혼식 축하의 흠 없는 완벽함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몇 달 또는 몇 년 후에 일상적인 가정생활의 불완전함 앞에서 쉽게 스며드는 환멸과 소홀함이 있다: 문제가 생길 때,상대방의 결점들이 발견될 때, 서로가 소통하고, 들어주고, 상처를 치유하고, 아낌없이 애정을 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 "혼인의 성소적 의미"가 흐려질 수 있는데, 그 때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그대로를 내어 주도록...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가 되도록... 성소로 부름받았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느님이 행복하기를 원하셨을 가정이, 어려움 속에서도, 중간에 머물러 "참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상호 사랑하는 가정으로 세상에 태어나기를 원했던 새로움이... 새로움,진정한 삶이 모퉁이 뒤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 모퉁이가 다소 빗나가 있더라도,어떤 모퉁이든 결국 그렇듯이, 단순히 약간의 애정과 관심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날, 그들은 서로의 사랑에 관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그러나 진정한 대답은 오직 삶과 함께 온다: 대답은 육화되고 상호적인 “예”의 "영원히"는 천천히 만들어져야 한다. "사람은 항상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자신의 전 생애로 대답한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떤 말과 어떤 논거들로 자신을 변호하려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모든 것의 끝에, 모든 질문들에 자신의 삶을 토대로 대답한다[119]. 너는 누구인가? 네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전 생애로 대답한다."
전 생애라는 것은 거듭거듭 정복되면서 점점 더 깊게 진정성을 찾아간다:시작의 피할 수 없는 순진함을 명석하지만 냉소적이지 않은 순수함으로; 알지만 사랑하는 "예, 자기야"로 변화시켜 간다.
진정으로 사랑을 위한 이러한 포기할 수 없는 “예”의 깊이는 교회가 연인 관계와 부부의 생명의 개방성에 관한 가르침을 시대에 역행하며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녀를 시대에 뒤떨어지고 엄격하다는 비판을 받게 할지라도, 하느님이 그녀를 개인적 사랑을, 특히 그것의 "원초"에서 [120]보호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내로서 고집한다.
교회는 이것으로 교과서 같은 추상적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삶의, 가족의 구체적인 진리를 보호한다; 사람들의 관계를 진정한 치명적 질병으로부터 보호한다... 처음에는 로맨스와 승리의 옷을 입고 교묘히 스며드는 독이지만 아마도 몇 년 후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감옥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이기심, 특히 그것이 두 사람 모두를 사로잡았다면 말이다.
"내 몸과 함께 즐기고자 하는 누구든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즐기겠다"고 별다른 말 없이 하는 이에게는 겉보기에 관대함과 삶의 기쁨이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메아리가 들리는 삶을 보는 방식이다: 젊음은 맛있는 과일이다...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 하느님이 왜 내 입에서 그 달콤함을 빼앗으시려 하겠는가? (창세 3,2.6 참조).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골판지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도 같은 매력을 느끼지만 신기루 같은 무엇인가를 직감한다; 그들은 더 깊이 보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노력으로 또는 어쩌면 잃었을지 모르는 순결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기를, 소모하지 않고 사랑하기를 준비한다.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는 이 삶의 욕구를 누구와 나눌 것인가? 정말로 이 사람인가? 정말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단지 함께 있으면 좋을 뿐인가?"
그들은 자신의 몸과 함께 자신의 마음도, 인격도,자유도 줄 것임을 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오직 "영원히"라는 예 안에만 진정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안다; 그들도 아무도 "조건 없는" 예보다 못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 결정이 없다면 그들은 선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다른 이들도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비록 시간이 지나서 발견하게 될지라도 그들을 속으로 비게 만들 선물일 것이다.
같은 근본 논리가 독신 성소에도 적용된다. 독신자도 날마다 자신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혼인과 독신은 서로를 비추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둘 다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이 우리 안에 심어두신 오직 당신의 모상에서 이해되는 무상성의 논리를 발산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선물임을 알고 다른 이들을 보호해야 할 선물을 본다: 부모, 자녀, 조부모, 모든 이에게서 본다.
예수님이 사랑의 깊이를 계시하실 때, 당황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셔야 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렇게 하도록 허락받은 이들만이 할 수 있다"(마태 19,11).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부모들은 때로 주위에서 몰이해를 느낄지라도, 근본적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을 존경한다는 것을, 때로는 그 이유를 잘 모를지라도, 알아야 한다.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진실한 사랑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으로"(로마 8,26) 모든 남자와 여자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기쁨과 자유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당하기 싫은 마음은 평생을 사랑 없이 보내리라
라파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치유하신다", 즉 "하느님이 돌보신다"는 뜻이다. 토빗, 안나, 토비야, 사라의 공통 역사에서 대천사의 개입은 평상시 지각할 수 없는 현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에 중점을 두시는 그분의 중요성(토비 12,11-15 참조).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기를 원하신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가까이 두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먼 나라로"(루카 15,13) 떠난 탕자의 이야기에서,우리는 개인적 역사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역사들도 인식할 수 있다: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세상, 그리하여 많은 가정들이 고통받고 때로는 파선하는 적대적 환경이 되는 세상. 그러나 비유에서 아버지처럼 하느님은 기다리는데 지치지 않으신다: 치유해야 할 상처들이 많을지라도, 항상 그런 현실들, 때로는 비극적인 현실들에 거하시는 방법을 찾으시며, 각 사람과의 만남으로 돌아가신다.
토비아서도 우리에게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과 배려가 내외적인 모든 어려움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토빗은 고결한 사람이고, 심지어 영웅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가 실명하는 것을 허락하신다(토비 2,10 참조). 그의 아내가 가족을 위한 수입을 벌어야 하고, 한번은 새끼 염소를 선물로 받는 일도 일어난다.
토빗은 아마도 자신의 장애로 인해 다소 신경질적인 기분에서,자신의 아내가 그것을 훔쳤다고 믿고 의도치 않게 가정의 폭풍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1인칭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는 그녀를 믿지 않았고,그녀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며,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고집했다.그러자 그녀가 나에게 대답했다: '당신의 자선과 선행이 어디 있습니까?보십시오, 그것들이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는지!'"(토비 2,14). 이 답변의 가혹함 앞에서, 토빗은 "영혼이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고는 흐느끼며 기도하기 시작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데려가시라고 청한다(토비 3,1-6 참조).
그러나 토빗은 항상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의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계속 노력한다. 예를 들어, 토비야가 이미 행복하게 결혼하고 아버지가 회수하라고 맡긴 돈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있을 때, 처음부터 그 여행에 반대했던 그의 어머니 안나는 최악을 두려워한다: "내 아들이 죽었다. 내 아들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 (...). 아, 아들아, 내 눈의 빛이여!왜 너를 보내 주었을까?" 역시 걱정하고 있는 토빗이 그녀를 진정시키려 한다: "조용히 해, 여보, 걱정하지 마. 분명히 괜찮을 거야. 지연되었을 거야.그의 동반자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고 우리 친척이야. 걱정하지 말아 여보,곧 돌아올 거야."
그의 설명은 효과가 없다. "그만둬! 거짓말로 나를 속이지 마. 내 아들은 죽었어"라고 안나가 대답한다. 그러나 모성적인 모순으로 그녀는 비밀스럽게 그의 귀환을 계속 기다린다: "날마다 그녀는 아들이 떠난 길을 바라보았다. 아무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다.해가 질 때, 집으로 돌아와서 잠들지 못하고 밤을 보내며 한탄하고 울었다"(토비 10,1-7).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가정의 일상적 문제들이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는 것은 위안이 된다. 오해, 소통 부족,자녀들에 대한 근심... "그런 어려움에 부딪혀 사랑과 만족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이는 혼인과 인간적 사랑에 대해 빈약한 개념을 가질 것이다."[121]
초기의 연애 감정 -가정을 이루는 계획으로 환상을 품게 하는 그 힘- 은 상대방의 거의 모든 결점들을 사각지대에 두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몇 주간의 지속적인 동거를 하다 보면, 누구도 결혼생활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혼인 생활은 팀으로서의 회심의 길이다. 남편과 아내가 매일 서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한, 서로의 마음은 점점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비록 그들의 한계가 지속되고 심지어 결정화될지라도.
(28)
한 오래된 노래가 말한다: "고통을 당하기 싫은 마음은 평생을 사랑 없이 보내리."[122] 실제로, "어떤 식으로든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뒤틀릴 것이고, 아마도 부러질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온전하게 유지하기를 확신하고 싶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아무에게도 심지어 동물에게도 주어서는 안 된다. 변덕과 작은 사치들로 조심스럽게 둘러싸야 하고; 모든 헌신을 피해야 하며; 우리 이기심의 상자나 관 속에 자물쇠로 잘 보관해야 한다."[123]
토비야와 사라에게처럼 악령의 작용으로 첫 결혼식 밤에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야 하는 일은 확실히 일나지 않는다(토비 6,14-15; 7,11 참조). 그러나 이기심이라는 악마 -치명적인 질병-는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마찰들"을 "산으로 만드는" 유혹으로 모든 가정들을 끊임없이 괴롭힌다.[124]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가 비록 힘든 일들일지라도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각자가 점점 담 뒤로 방어선 치는것을 피하기 위해서: 사랑을 가능케 하는 감정을 재건하기 위해서. 성 호세마리아는 "다투는 것도,너무 빈번하지만 않다면, 부부의 사랑의 표현이고 필요하다"라고 말한다.[125]
물은 흘러야 한다 고여 있으면 썩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있고 그들과 대화할 시간을 찾고, (...) 반항할 때 일부분 그들의 진리 -또는 완전한 진리- 를 인정하는"것도 얼마나 중요한가.[126] 그러므로 대화하고 함께 생활하기를: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리고 그 전에 연애 시절에.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의 빛을 주시도록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당신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성경 이야기가 토비야와 사라의 불화들을 보여주지는 않지만,우리는 토빗과 안나처럼, 그리고 모든 가정들처럼 그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 까지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었을 것이라고도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혼인이 하느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그들이 결혼식 밤에 기도한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함께 노년에 이르게 하소서"(토비 8,7).
"가정의 교황"[127]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아가서의 부부 사랑을 토비야와 사라의 사랑과 비교했다. 아가서의 부부는, 그가 말하기를, "열정적인 말들로 서로의 인간적 사랑을 선언한다. 토비아서의 새로운 부부는 하느님께 사랑에 응답하는 법을 알게 해달라고 청한다."[128] 혼인 사랑의 이 두 초상을 가까이 함으로써, 그는 질문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둘 중 어느 것이 그것을 더 잘 반영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둘 다이다.두 마음이 만나는 날, 그들의 성소는 아가서 부부의 것처럼 싱싱하고 젊은 얼굴을 갖는다. 그러나 그 얼굴은 살아가는 동안에 서로가 사랑에 응답하라는 자신들의 부름을 다시 받아들일 때마다 그 젊음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때, 그렇다, 그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129]
카를로스 악셀라
[107] 성 호세마리아, “길”, 27번.
[108] 성 호세마리아,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30번. 22-30번 참조.
[109] 후안 라몬 히메네스, “영원들”, 마드리드 1918, 126쪽.
[110] “길”, 27번; 360번 참조.
[111] 성 호세마리아, 내적 기록들, 1697번, 1932년 10월 10일, A. 바스케스 데 프라다, “오푸스 데이 설립자”, 제1권, 리알프, 마드리드 1997, 477쪽에서 인용.
[112] 성 호세마리아, 묵상 기록들, 1947년 10월 12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41쪽.
[113] 같은 곳.
[114] 성 요한 바오로 2세 그러므로 혼인을 "원초적 성사"라고 불렀다.
[115] F. 오카리스, 사목 서한, 2017년 2월 14일.
[116] 프란치스코,일반 알현, 2015년 9월 2일.
[117] J. 마라갈, "삶의 찬양", “쓰여진 삶”,아길라르, 마드리드 1959, 105쪽.
[118]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43번.
[119] S. 마라이, “마지막 만남”, 살라만드라, 바르셀로나 2007, 107쪽.
[120] F. 오카리스, 사목 서한, 2017년 6월 4일.
[121]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24번.
[122] "높은 나무들에게", 성 호세마리아가 “길” 145번에서 언급하는 민요.
[123] C.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리알프, 마드리드 1991, 135쪽.
[124]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23번.
[125] 같은 곳, 26번.
[126] 같은 곳, 27번.
[127] 프란치스코,요한 바오로 2세 시성식 강론, 2014년 4월 27일.
[128] 성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1984년 6월 27일.
[129] 같은 곳, 그리고 아가 8,6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