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푸스데이 단장 주교의 10 월 사목서간

죄의 용서를 주제로 한 에체바리아 주교의 사목 서간이다.

나의 영적 자녀들이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지난 수 주간, 교황님의 권고에 의해, 세계와 양심의 평화를 기원하는 지속적인 기도가 많은 곳에서 하늘로 바쳐 올려졌습니다. 나는 성 호세마리아께서 지난 1952년에 하셨던 제안이 현존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성인께서는 “Cor Iesu Sacratissimum, dona nobis pacem!(예수 성심이여,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이라는 화살기도를 자주 권하셨습니다. 수 년 후 성인께서는 그 문구에 et Misericors(자비로우신)라는 말을 추가하셨습니다. 지극히 거룩하고 자비로운 예수 성심께 전 세계를 위한 평화를 간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는 영적인 평화와, 적의와 폭력을 거부하는 모든 민족 간의 인간적인 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께서도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셨고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세계에 금식과 기도의 날을 가질 것을 요청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회의 평화를 위한 간구는 우리가 죄악에 대항해 결연히 싸워 하느님과의 평화를 달성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전쟁과 폭력, 적대의 중단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성 호세마리아께서 초임 사제 시절에 하신 말씀을 상기합니다. “비밀, 아주 공공연한 비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위기는 곧 성인의 위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 활동에서 ‘당신께 속한’ 한 줌의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pax Christi in regno Christi—그리스도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1]

이 성찰은, 언제나 시의적절하게, 오푸스데이의 창설 전날에 특별한 적실성을 획득합니다. 1928년 10월 2일에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 우리의 아버지께 세상의 모든 남녀에게 그들이 거룩함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는 당신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그의 손에—그리고 그의 영혼과 가슴에―오푸스데이를 남겨주셨습니다. 직업과 일상생활의 성화를 위한 길이며 이를 위한 정신과 적합한 사도적 수단을 주신 것입니다.

그 후로 85년이 흘렀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푸스데이는 교회와 영혼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봉사의 사명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분명한 하느님의 분부에 충실하고 있는지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자랑이 아니라 우리는 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창설자께서는 전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오푸스데이를 통해 지상에서 하느님의 길이 성소적 방식으로 열리게 되었다.’” [2] 우리의 마음을 담아 복되신 성삼위와 하늘의 모든 은총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동시에 생각합시다. 내가 이 메시지를 내 마음과 다른 이들의 마음에 보다 깊이 심기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내가 좀더 기도하고 더 많은 희생을 바치고 더 큰 노력과 바른 자세로 직업적 사무를 처리하여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봉사할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은가?

지난 몇 달 간,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신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또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 왜냐하면 성령께서 교회의 품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하느님 자녀로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이신 교회는 부단히 그 자녀들을 돌보시어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하십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이―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하여—교회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하고 심지어 교회의 자녀인 우리의 잘못과 결점들 때문에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존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로 기우는 가련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교부들과 교회가 천국으로 인도한 수 많은 거룩한 영혼들의 관점은 매우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은 아버지로서, 교회는 어머니로서.” [4] 또한 성 키프리아노는 두 세기 전에 역설하였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으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 [5]

최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신앙의 진리를 새롭게 표현하셨습니다. “신앙은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례성사로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줍니다. 이는 교회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탄생시키는 순간입니다.” [6] 우리가 세례 성수 안에서 성삼위의 권능과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은 우리의 지상 삶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교황님과 함께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듯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나를 신앙 안에 태어나게 해 주신 교회에 감사하는가?” [7] 오푸스데이에서는, 하느님과 성 호세마리아의 보살핌으로, 우리는 이 현실을 잘 인식하고 있고 이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바오로 6세께서 오늘과 같은 날에 우리의 아버지께 보내신 친필 편지에서 강조하신 바처럼) 우리 시대에 “교회의 영속적 젊음의 활기찬 표현” [8] 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창설자와 일치하여, 그리고 이미 천국의 고향에 돌아간 많은 오푸스데이 형제들과 일치하여, 우리는 외칩니다. “혼신의 열정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너무나 기쁩니다. 나는 어머니이신 성교회를 사랑합니다!” [9]

신경에 대한 성찰을 계속하면서, 지금 막 내가 쓴 것과 일관되게, 다음의 신조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10] 이 신조가 신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죄의 용서에 대한 믿음을 성령에 대한 믿음과 연결시킬 뿐 아니라 교회와 성인의 통공에 대한 믿음과도 연관시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신적 권능을 주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1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화의 수단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지상 삶에서의 말씀과 행적은 구원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예수께로 와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만지려고 애쓴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오히려 우리에게는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12] 그 말씀과 행적은 예수께서 종국적으로 악마, 죄, 죽음을 정복하신 파스카 신비가 지닌 능력을 선포하고 예기하였고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예수께서 교회에 전달하실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드러내는 신비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의 봉사자들을 통하여 성사 안에서 나누어 주시는 것의 기초가 된다. ‘우리 구세주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이 그분의 성사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13]

성사는 그것이 표징하는 은총을 부여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1967년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화신이 남기신 발자취, 하느님께서—그분 외에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선택하고 정하신 길의 분명한 표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 성사에 고유한 징표에 따른 은총을 주기 위해 이용하시는 적절한 도구가 아니라면 성사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1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충실함으로 이런 보화를 보존하고 우리에게 제공하는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에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부지런하게 그것을 온전히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지요! 우리는 특히 세례성사에 감사합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를 하느님 자녀들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합니다. 세례성사를 가능한 한 일찍 받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 성사(또는 묵시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고자 하는 원의)는 구원을 얻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15] 물론, 교회의 가르침이 설명하듯이, 교회의 가시적 테두리 밖에서도 성령께서 작용하실 수 있고 또 작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당신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을 받는 통상적인 길은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정립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 [16] 입니다. 우리는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읽습니다. “구원의 은총이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어린이 세례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출생 후 가까운 시일에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와 부모는 그 아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 [17] 그리고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어린이 세례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생명을 양육하는 역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18]

세례성사는 죄를 용서하고 첫 은총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성사로 가는 관문이며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더욱 그리스도와 가까워져 결국에는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될 수 있도록 합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모든 세례 받은 이들 안에서 믿음, 희망, 사랑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수단을 보관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는 교황님께서 지난 달 동안 하신 교리강의 중에 표현하신 바입니다. “어머니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심한 돌봄으로 자녀들이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젖을 주고 먹이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항상 보살핌과 애정, 사랑으로 자녀들을 따라다닙니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자녀들을 어떻게 바로 잡고, 용서하고, 이해할지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병들고 아파할 때 가까이 있는 법을 압니다.” [19] 교회는 세례성사를 통해 태어난 자녀들을 같은 방식으로 대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여 우리를 성장시키고. . . 성사를 집전합니다. 성체성사로 우리를 기르고, 고해성사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가져다 줍니다. 병자성사로 병 든 우리를 보살펴 줍니다.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삶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걸쳐 우리와 함께 합니다.” [20]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는 얼마나 큽니까! 우리가 나약하고, 선의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죄와 잘못에 빠지는 것을 아시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배필에게 “당신 교회의 모든 지체, 누구보다도 우선 세례 후 대죄에 떨어져 세례로 받은 은총을 잃고 교회의 친교에 손상을 입힌 사람들을 위하여” [21] 용서의 성사를 맡기셨습니다. 이 성사는 또한 소죄와 잘못들을 사하고 내적 투쟁을 위한 새로운 힘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교부들이 말한 바와 같이 “은총을 잃어버린 난파 후 두 번째 구명대” [22] 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성 호세마리아께서 화해의 성사(성인이 즐겨 부르시길 “기쁨의 성사”)에 대해 가지셨던 큰 사랑과 사람들에게 그 성사를 자주 볼 것을 권장하셨던 것을 상기합니다. 이렇게 하여 지속적인 “고해의 사도직”에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성인께서 많은 사람들과 가졌던 교리 모임 중에 하신 말씀 몇 가지를 다시 적고자 합니다.

“고해, 고해, 고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에 자비를 퍼부으셨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가 씻겨지고 정화되고 밝아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씻고 또 여러 운동을 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다른 운동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 씻겨주며 정화시키고 밝혀주는 샤워에 대해서는? 왜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러 가지 않습니까?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가세요, 가! 하지만 당신의 영혼이 깨끗하다는 확신이 없다면 영성체를 하지 마십시오.” [23]

또 다른 때에 성인께서는 주장하셨습니다.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친구들, 친척들,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해성사로 인도하십시오. 그들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뭔가 잘라내야 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얘기하세요. 한 번 고해성사 보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많이, 자주 보아야 한다고. 마치 사람이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의사에게 한 번만 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가게 되는 것처럼. 그러면 의사들은 혈압도 재고 여러 검사를 합니다. 영혼에 대해서도 똑같이, 똑같이. . .”

“하느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라는 목욕을 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을 위해 큰 잔치, 결혼 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약속과 충실함과 끝없는 우정의 결혼 반지인 성체성사의 잔치를.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보기를. . . 하느님의 용서에 많은 사람들이 다가가기를!” [24]

오는 6일에 우리는 성 호세마리아 시성 기념일을 지냅니다. 그 날에 교회와 세계는 일상 생활에서의 성화라는 부르심이 새로운 힘으로 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현실을 일깨울 좋은 기회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성사에 다가가도록 그들에게 권고하십시오. 26일은 아버지 성인께서 1952년 그 날에 오푸스데이를 지극히 거룩하고 자비로운 예수 성심께 봉헌하신 기념일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이를 매년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갱신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만 쓰겠습니다. 계속해서 교황님의 지향과 긴밀하게 일치하도록 합시다. 교황님이 마음에 담고 계신 것들을 위해, 교황님을 도와 교회를 다스리는 분들을 위해, 사람들의 양심과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매일 기도합시다. 날마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 우리의 간청 안에서 한 마음이 되도록 합시다. 하루도 빼먹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2013년 10월 1일 로마에서

여러분의 아버지

+하비에르

[1] 성 호세마리아, 『길』, 301항.

[2] 성 호세마리아, 「1953년 8월 15일 서간」, 12항.

[3] 에페 4:13.

[4]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해설』, 88, 2, 14 (PL 37, 1140).

[5] 성 키프리아노, 『가톨릭 교회 일치론』, 6(PL 4, 519).

[6] 교황 프란치스코, 일반알현 연설, 2013. 9. 11.

[7] 위의 연설.

[8] 교황 바오로 6세, 성 호세마리아에게 보낸 친서, 1964. 10. 1.

[9] 성 호세마리아, 『길』, 518항.

[10] 로마 미사경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11] 『가톨릭 교회 교리서』, 976항.

[12] 루카 6:19.

[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1115항. 성 대 레오, 『설교집』 74, 2 (Pl 54, 398).

[14] 성 호세마리아, 「1967년 3월 19일 서간」, 74항.

[15] 요한 3:5.

[16]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52항.

[17] 위의 책, 1250항.

[18] 위의 책, 1251항.

[19] 교황 프란치스코, 일반알현 연설, 2013. 9. 11.

[20] 위의 연설.

[21]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46항.

[22] 위의 책 같은 곳;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제14장; DS 1542, 테르툴리아누스, 『참회론』, 4, 2; CCL 1, 326(PL 1, 1343) 참조.

[23] 성 호세마리아, 회합 기록, 1974. 7. 2.

[24] 성 호세마리아, 회합 기록, 1974.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