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과 함께 성주간 지내기

4월 1일 메시지에서,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장은 우리들을 “성주간의 전례들을 교황님과 하나가되어 전자기술이 제공하는 이 기회들을 이용하여 따르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로 격려했습니다.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이 기사는 성주간 동안 교황님의 강론, 메시지들을 업데이트 할 것입니다.

교황님의 성주간 전례 스케쥴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성주간의 예식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4월 5일 일요일 오전 11시 (로마시간) <대한민국 시간 오후 6시>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시작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나머지 성주간 전례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대한민국 시간>

2020년 4월 10일 @ 오전 1시: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미사

2020년 4월 11일 @ 오전 1시: 주님 수난 성 금요일

2020년 4월 11일 @ 오전 4시: 십자가의 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2020년 4월 12일 @ 오전 4시: 파스카성야 미사

2020년 4월 12일 @ 오후 6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미사 후 "Urbi et Orbi"강복이 뒤따릅니다.

교황님의 전례들을 여기에서 함께 할 수 있고, 다른 방송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7 참조). 성주간 동안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내어 맡깁시다. (그 말씀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을 종으로 드러내 보입니다. 성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을, 성금요일은 고난 받고 승리하는 종을 소개합니다(이사 52,13 참조). 그리고 내일 성주간 월요일부터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에 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다”(이사 42,1). 하느님은 우리를 섬기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제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섬기신 겁니다. 사랑받지 않고서 사랑하기란 어렵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섬기시도록 우리가 내어 맡기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섬기셨는가?’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우리는 사랑스러우며 비싼 대가를 치른 존재입니다. 폴리뇨의 성녀 안젤라는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너를 농담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시고, 우리의 모든 악을 몸소 짊어지시게 했습니다. 놀라서 입을 떡 벌리게 만드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의 악이 그분에게 대들도록 놓아두시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악에) 대응하지 않고 그저 겸손, 인내, 종의 순종만으로, 전적으로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섬김을 지지하셨습니다. 그분을 공격하던 악을 쳐부수시는 대신에 그분의 고통을 지지하셨습니다. 오직 선으로 우리의 악을 이기도록, 사랑이 끝까지 관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끝까지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심에 있어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마저 감내하셨습니다. 곧, 배신과 버림받음입니다.

배신. 예수님은 당신을 팔아 넘긴 제자의 배신과 당신을 부인했던 제자의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을 ‘호산나’로 외치며 환호했지만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사람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종교제도에 의해, 손을 씻었던 정치상황에 의해 배신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배신을 생각해봅시다. 신뢰가 속임수로 변하는 것을 볼 때는 정말 끔찍합니다. 마음 깊은 데서 실망이 생기고, 그런 이유로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우리에게 진실되고 가까이 있다고 약속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하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있어서 배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을 살펴봅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솔직하다면, 우리의 불충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거짓, 위선, 이중성이 있습니까! 선한 의도는 얼마나 자주 배신당합니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많은 제안들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까!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 마음을 더 잘 아시고,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일관성이 없는지, 얼마나 자주 죄에 빠지는지, 다시 일어서려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어떤 상처가 낫기 힘든지 잘 아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우리를 만나러 오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우리의 불충실을 몸소 짊어지시고, 우리의 배반을 떨쳐버리시면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낙심하는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리고, 그분의 포옹을 받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 저의 불충실이 여기 있사오니, 당신께서 거두어주십시오. 저에게 팔을 벌려주시고, 당신 사랑으로 저를 섬기시고, 계속 저를 도와주십시오. (...) 그러면 저는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버림받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구절을, 단지 이 말씀만 하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아주 강한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도망갔던 당신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아직) 아버지가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고독의 깊은 심연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이라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그분을 부르십니다. 그분에게 “큰 소리로” “어찌하여?”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가장 괴로운 “어찌하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씀은 사실 시편의 말씀(시편 22(21),2 참조)입니다. 예수님이 극적인 절망 역시 기도 안으로 가져오셨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시련을 받으셨던 사실도 남아 있습니다. 복음은 그분이 직접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분이 가장 큰 버림받음을 감내하셨음을 증언합니다.

어째서 이 모든 걸 이렇게 하셨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를 섬기기 위해 그러신 것입니다. 우리가 궁지에 몰렸다고 느낄 때, 막다른 골목에서 빛이나 탈출구도 없이 나갈 곳을 찾지 못할 때,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보일 때조차도, 우리는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온전히 연대를 이루기 위해 당신에게는 가장 낯선 상황, 곧 완전한 버림받음을 감내하셨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 위해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혼자 있지 않단다. 나는 네 곁에 항상 있으려고 너의 모든 절망을 겪었단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끔찍한 고통의 심연, 곧 배신과 버림받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산산조각나는 수많은 신념과 배반당하는 수많은 희망 앞에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 사랑에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를 붙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위로를 느끼게 되리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배신과 버림받음을 감내하실 정도로 우리를 섬기셨던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우리는 배신할 수 없고,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나머지 것들은 지나가지만, 이것만이 남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길을 잃지 말고 진지한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섬기지 않는다면 삶도 소용없다는 것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은 사랑으로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번 성주간 동안, 집안에서 십자가 앞에 머뭅시다. 그리고 바라봅시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바라봅시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척도입니다. 목숨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신 하느님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섬기기 위해 사는 은총을 청합시다. 고통을 겪는 이, 혼자 있는 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만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합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다’(이사 42,1). 수난 중에 예수님을 붙들어주신 아버지께서는 우리 또한 섬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사회와 가정에서 사랑하고 기도하며 용서하고 타인을 돌보는 일은 분명 희생의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섬김의 길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는 승리의 길입니다. 특히 35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봉헌된 오늘 ‘세계 젊은이의 날’에 젊은이들에게도 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이 며칠 동안 빛을 받는 참된 영웅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명성이나 돈을 많이 갖고 있다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내어놓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느끼십시오.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히려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내어주면서 받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가장 큰 기쁨은 사랑에 대해 ‘만일’이나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 ‘만일’이나 ‘하지만’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황의 성주간 영상 메시지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저녁에는 제가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고자 합니다. 역경과 고통의 이 시기에 여러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감염을 피하기 위해 보기 드문 일상을 보내고 있는 여러분 가정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생기 넘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집 밖에 나갈 수 없고, 학교에 가지 못하며, 일상적인 생활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모든 가정들, 특별히 감염된 가족 구성원이 있거나,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혹은 다른 이유로 안타깝게도 가족 구성원과 이별한 가정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더더욱 힘들게 마주하고 있는 홀로 지내는 분들을 자주 떠올립니다. 특별히 제가 무척 사랑하는 노인들을 자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창의력’ 입니다.

저는 병원에 입원한 코로나19 감염자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감염자들을 돌보는 이들이나 사회에서 중요한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매일, 매순간,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있는지요! 한편 저는 경제적으로 궁핍에 시달리는 이들과 일자리나 미래 때문에 걱정하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의 고통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이 감염에 노출될까 하는 두려움으로 커져갑니다. 저는 지켜줄 집이 없는 노숙자들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입니다. 많은 이들이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교황은 이를 알고 있으며, 이번 영상 메시지를 통해 교황의 긴밀한 관심과 사랑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노력해봅시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에게 다가가 도움을 줍시다. 전화를 걸거나 문자(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SNS) 등을 통해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들을 찾아 갑시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전 세계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시다. 비록 우리가 격리되어 있을지라도, 우리의 생각과 정신은 사랑의 창의력으로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랑의 창의력’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 그리고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요약하는 성주간을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복음 말씀은 우리 도시의 침묵 중에도 다시 울려 퍼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코린 5,15).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파스카 신앙이 우리의 희망을 길러줍니다. 오늘 저녁 저는 여러분과 이 희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마침내 악과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에서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것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입니다. 환상이 아닌 희망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인내로 서로가 서로의 곁에 머물며 더 나은 날을 준비합시다.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할 수 있도록 저를 허락해준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고통받는 이들, 어린이들, 노인들을 애정으로 대하십시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교황인 제가 긴밀한 관심을 갖고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악(고통)에서 빨리 해방시켜 주시길 기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끝으로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자료제공: 바티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