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단장 주교 사목서간

죽은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사목서간

나의 영적 자녀들이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몇 주 후면 신앙의 해가 끝이 납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오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이를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에게 아버지 성인의 강론 중 몇몇 말씀들을 다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신경을 욀 때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성령에 의해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와 부활의 희망에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 말들이 진정 우리의 가슴 깊이 관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 입술 위에만 머물러 있습니까?”1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모든 성인 대축일과 내일 위령의 날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전례적 축일은 신앙의 마지막 조항을 반영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믿음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신경은, 세말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에서 절정에 이른다.”2

신경은 개개인과 전 우주에 닥칠―개인적 차원에서나 집단적 차원에서―“최후의 일들”을 요약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올바로 작동한다면, 지상의 삶 후에 “저 너머”의 삶이 존재함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이 지상에서 그토록 자주 훼손되었던 정의가 완전하게 재정립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느님의 계시 안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강생, 죽음,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 진리는 신비의 장막에 싸여 있으면서도 분명한 형태를 획득합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 덕분에 최후의 현실은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가져왔고 또 가지고 있는 암울하고 숙명적인 의미를 상실하였습니다. 육체적 죽음은 모두에게 자명한 현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죽음은 단지 물질적 피조물임에 따른 결과로서 자연스레 분해되고 마는 것이 아니며, 구약이 계시하듯, 죄에 따른 처벌인 것만도 아닙니다. 성 바오로께서는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이라 하셨고 또 다른 곳에서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3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지닌 본질적 새로움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이미 성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 중에 죽으면 육체적인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성취하고,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속량 행위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한 몸이 된다.”4

교회는 모든 순간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세례수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함께 내세 불멸의 약속을 전달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성사들을 통하여,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 “있음”과 “나아감”이 우리 영혼 속에서 강화되도록 합니다. 후에 중병이 오거나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교회는 다시 한 번 그 자녀들에게 몸을 기울여 병자성사와 노자성체로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교회는 우리가 하느님 은총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 안에서 끝나게 될 마지막 여행을 희망과 기쁨에 찬 평화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그분 전후의 많은 성인들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분명하고도 낙관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관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이세요...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때에,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내가 말하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최선의 순간, 최선의 장소, 최선의 방식으로,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대로 올 것입니다. 우리의 자매, 죽음은 환영 받으라!”5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영혼을 맡기는 많은 사람들―오푸스데이 남녀 회원, 그 친지 및 협력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가깝게 일치된, 평화로 가득 찬, 거룩한 선종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입니다(로마 5:5 참조) . . . 우리 삶에서 희망은 얼마나 자주 사라집니까, 얼마나 자주 우리 마음 속 기대는 허사가 되고 맙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걸어가게 하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희망은 강하고, 안전하며, 온전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나 충실하신 하느님께 기초하고 있기에 영원으로 열려 있습니다.”6

먼저 떠나간 신자들에게 바쳐진 이 달 동안 나는 여러분에게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최후의 일들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다시 읽고 묵상할 것을 권합니다. 거기에서 희망과 초자연적 낙관주의, 매일의 영적 투쟁을 위한 새로운 자극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간 중에는 많은 곳에서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 경건한 관습이기도 한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사도직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영원한 진리에 대해 묵상하고 아버지의 자상함으로 우리를 따라다니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한층 더 부지런히 찾는 기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죽음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선행을 하고 공로를 쌓는 시간은 끝이 나고, 각 영혼은 즉시 개인적 심판을 받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앙의 일부분입니다. “각 사람은 죽자마자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셈 바치는 개별 심판으로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러한 대가는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다.”7

이 심판의 주된 초점은 계명과 합당한 의무를 충실하게 실천함으로써 보여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정당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 말씀하셨듯,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삶도 죽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에 굳게 매달려 있다면, 죄를 범한 후나 우리의 불완전함을 정화시키기 위해 고해성사에서 주님께 뉘우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자주 영한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두려워할 아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주님께서 그대에게 요구하실 “성적표”에 대해 그대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는 많이 웃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주님은 심판관―엄격한 의미에서―이 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저 예수님이실 뿐입니다.’ 한 선한 주교가 쓴 이 글귀는 한 명 이상의 괴로움에 빠진 영혼을 위로하였고, 당신에게도 역시 위로가 될 것입니다.”8

게다가 (이 사실은 우리를 참으로 기쁘게 하는 것인데) 죽음 후에도 교회는 그 자녀를 버려두지 않습니다. 모든 미사에서 교회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세상을 떠난 신자들의 영혼이 영광에 들 수 있도록 전구합니다. 특히 11월에 교회의 이러한 청원은 더욱 간절해집니다. 오푸스데이라는 교회의 “작은 부분”에서 우리 또한 그 원의를 함께 합니다. 오푸스데이 회원과 세상을 떠난 우리의 친지 및 협력자들 그리고 모든 연령들을 위해 거룩한 희생제사와 영성체를 봉헌함으로써 이 시기를 위한 성 호세마리아의 권고를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충실히 이행합시다. 최후의 일들을 묵상하는 것이 결코 슬픔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기쁨의 원천이 됨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완전한 믿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최종적 부르심과 마지막 날에 세상의 완성을 기다립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당신의 왕국을 차지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상에 살았던 모든 이들의 부활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것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소였다”고 지적합니다.9 그리하여, 처음부터, 이 신앙은 몰이해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생명이 영적으로 지속된다는 사실은 매우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확실히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가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10 하지만 이것은 시간의 끝에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으로 실제로 일어날 일입니다. 아타나시오 신경은 적나라하게 진술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육신과 함께 부활하여 자기 행위에 대하여 셈 바치리라. 선을 행한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고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로 가리라.”11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자애로운 굽어보심은 놀라움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혼과 육신,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만드셨고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가 그대로 그분께 돌아가 내세에서 영원히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 지혜를 향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단일한 계획에 따라, 한 피조물이 우리에 앞서 이 영광스런 부활로 갔습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몸과 영혼이 함께 올림 받으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이십니다. 희망과 믿음에 찬 낙관을 갖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신성한 약속을 현존케 하도록 합시다. 특히 슬프고 지치고 괴로울 때에 말입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 어느 기회에 최후의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표현하신 바를 봅시다. “주님, 저는 제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나이다. 저는 제 몸이 다시 제 영혼과 하나되어 영원히 당신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을 믿나이다. 당신의 무한한 공로를 통하여, 당신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당신께서 제게 보여주신 사랑을 통하여.”12 나는 이 서간이 조금이라도 비관적으로 읽히길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충실하다면, 하느님의 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길 바랍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 후에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것입니다. 개별 심판에서 이미 결정된 것들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에 “우리는 창조 업적의 궁극적 의미와 구원 경륜 전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이끄시는 당신 섭리의 놀라운 길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결론 짓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람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13

당연하게도 아무도 언제 또 어떻게 역사의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벌어질 물질적 세상의 쇄신 또한 어떻게 이루어질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섭리 안에 유보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따라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14 때문입니다.

신경에 대한 교리강의 중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촉구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보다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더욱 잘 살아가도록 재촉하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인내로 이 시간을 우리에게 허여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날이 가난한 이들과 낮은 이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십니다. 선을 위해 노력하고 기도와 사랑 안에서 주의를 기울입시다.”15 영원한 진리에 관한 묵상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한층 더 초자연적이 됩니다. 이는, 성 호세마리아께서 말씀하신 바 같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형태의 죄를 증오하게 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직 죄만이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서 우리를 멀리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이 최후의 진리를 깊게 고찰해 봅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희망은 커질 것입니다. 어려움에 닥쳐서도 낙관으로 가득 찰 것이고, 작은, 혹은 작지 않은, 잘못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은총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또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충실하다면 얻게 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행복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 완전한 삶, 곧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이다.”16

“천국. ‘눈도 보지 못했고, 귀도 들은 바 없으며, 누구도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들을 제대로 상상한 바 없다.’ 사도의 이 계시가 그대의 싸움을 계속해서 재촉하지 않습니까?”17 나는 감히 덧붙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자주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무한한 힘으로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계속해서 함께 하실 지극히 복되신 삼위일체께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립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황께서는 10월 18일에 나에게 알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교황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교황께서는 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성직자치단의 사도직에 애정과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나의 아들 딸들이여, 우리가 교황님과 그의 지향 그리고 교황님을 보좌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는 미사에서 아론과 후르가 모세의 팔을 아침부터 밤까지 떠받쳐 이스라엘을 위해 지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18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교황에게 지우신 사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기도와 고행으로 그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와 모든 가톨릭 신자의 임무입니다.

다가오는 22일은 성 호세마리아께서 1937년에 피레네 산맥을 넘으실 때 리알프의 장미를 발견하신 기념일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다음날에 일어난 이 사건을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종교의 자유가 존중 받는 곳에서 자유롭게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동을 계속하라는 하늘의 징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성모님께 더 자주 의지하라는 권고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지향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이 시기 중에 특히 9일에 부제품을 받을 여러분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영원한 진리에 관한 묵상이 우리 가슴에 가져다 주는 희망과 낙관을 가지고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준비합시다. 그리고 교황에 의해 오푸스데이가 성직자치단으로 설립된 기념일인 28일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2013년 11월 1일 로마에서

여러분의 아버지

+하비에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