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 전체에 걸쳐 당신의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차츰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새로 나게 하는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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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 전체에 걸쳐 당신의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차츰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새로 나게 하는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의 공동체입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보편 사제직에 참여합니다.곧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서로 이어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의 과업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는 신비입니다. 곧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고 친교를 이루는 실재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왔는데, 이는 ‘부름 받은 이들의 모임’을 뜻합니다.구약 성경에서 이 말은 ‘카할 야훼’(qahal Yahweh),곧 하느님께서 경신례를 위하여 불러 모으신 집회를 번역하는 데 쓰였습니다. 시나이 산의 집회, 그리고 요시야 임금 시대에 하느님을 찬미하고 율법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고자(개혁) 모였던 집회가 그 예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말은 구약과 연속성을 지니면서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특히 하느님께서 땅끝에서부터 부르시고 모으시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어, 당신 말씀에 대한 믿음과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이 된 모든 이의 집회를 이루게 하십니다.[1]

“교회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교회는, 장차 모든 민족들을 불러 모으는 일치의 징표인 이스라엘의 선택으로써,옛 계약 안에서 준비되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으로 세워지고,무엇보다도 속량을 위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실현되었다. 그 후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통하여 교회는 구원의 신비로서 드러났다. 교회는 지상으로부터 구원된 모든 이의 모임으로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2]

교회는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체험한 인간이 바친 고귀한 응답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으신 분이신 그리스도의 생애의 신비들 안에서, 율법과 예언서에 예고된 약속들이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생애 안에서, 그것도 그 생애 전체에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단 한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강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과 승천,그리고 보호자 성령을 보내심에 이르기까지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령께서 머무르시던 그리스도께서는 생애 전체에 걸쳐, 하나씩 차례로 마련해 가시면서 당신의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께서 온 교회에 파견되셨으며,성령께서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상기시키시고 역사 속에서 교회를 충만함으로 이끄시며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성사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원인이시며,여러 가지 교계적 은사와 카리스마적 은사로 교회를 끊임없이 꾸며 주십니다(“교회 헌장”, 4항, 12항). 성령의 현존으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당신 사람들과 함께 있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마태 28,20 참조).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인들의 통공

성경에서 교회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 하나하나는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라는 신비의 어떤 측면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이 받은 칭호입니다. 이 칭호가 새 이스라엘인 교회에 적용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관 없이 개별적으로 구원하려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하나의 백성으로 세우시어, 그 백성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거룩하게 당신을 섬기게 하고자 하셨다는 뜻입니다(“교회 헌장”, 4항, 9항; 성 치프리아노, “주님의 기도”, 23: CSEL 3, 285).

이 칭호는 또한 교회가 하느님께 선택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어떤 문화나 정부나 민족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 교회는 민족들 가운데에서 최종 고향을 향해 길을 걸어가는 가시적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 마지막 의미에서 “교회와 시노드는 동의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시편 149편 해설”: PG 55, 493). 우리는 모두 같은 공동의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걸어가고, 모두 같은 사명으로 부름 받았으며,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 안에서 모든 이는 하느님 자녀라는 공통된 존엄을 지니고,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공통된 사명을 받았으며, 하느님 나라라는 공통된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에 참여합니다.[3]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신자들을 당신과 긴밀히 결합시키신다는 점,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신자들은 사랑으로 하나 되어 머물고 자라며, 지체와 기능의 다양성 속에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이름은 한 지체의 건강과 병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1코린 12,1-24 참조), 그리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도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4]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불리는데(에페 5,26 이하 참조), 이 이름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이루는 결합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가 서로 구별된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아울러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이 결정적이라는 것,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고, 교회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를 낳는 풍요로운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분께 충실히 응답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가리키는 오래된 표현인 ‘친교’(communio)를 다시 사용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내밀한 친교가 인간 에게까지 확장된 것이며, 아직 그 충만함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이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이신 삼위일체와 이루는 친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친교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그 친교의 표지이며 도구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에 참여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드님 안에서 자녀로서(“사목 헌장”, 22항 참조) 하느님의 가족에 속하게 됩니다.이는 성사들 안에서, 특히 흔히 ‘영성체’(communio)라고도 불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1코린 10,16 참조).

교회는 communio sanctorum, 곧 성인들의 통공입니다.다시 말해, 성령의 새로 나게 하는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성도’(聖徒)라고 불리는 모든 이의 공동체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 이 지상에서 길을 걷고 있고,어떤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 우리의 기도에 힘입어 정화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미 하느님을 뵙는 지복을 누리며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있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은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거룩한 선물들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중심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성체성사를 지향하는 다른 모든 성사와 그 밖의 모든 은사와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이 지상에서 우리보다 앞서 간 모든 성인의 공로가, 주님께서 친히 교회 안에서 수행하라고 우리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도와줍니다.천국에 있는 성인들은 순례하는 교회의 삶을 무관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지 않으며, 주님의 재림과 심판과 육신의 부활로 성인들의 통공이 충만하게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례하는 교회와 그 지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삶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또 많은 영혼의 정화와 다른 수많은 영혼의 회개를 위하여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대와 내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따라 많은 큰일이 좌우됩니다.”[5]

그런가 하면 신자들이 자신의 한계나 잘못, 또는 자신이 짓는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몇몇 비유는 세상 끝 날까지 밀과 가라지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있다고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들이 큰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였고(2코린 4,7 참조), 신약 성경에는 거짓 예언자들과 다른 이들을 죄짓게 하는 자들을 경계하는 훈계가 여럿 있습니다(예: 묵시 2─3장).[6] 초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성직자 든 성품을 받지 않은 신자 든)의 죄는 교회의 사명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이, 행위로든 소홀함 으로든, 성직자 이거나 다른 이들을 돌볼 책임을 맡은 사람일 때에는 그 영향이 더 커지며, 심지어 남을 죄짓게 하는 일(걸림돌)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죄는 친교를 손상하고 그 결과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날 수도 있지만,결코 교회의 거룩함을 완전히 가리거나 교회의 사명을 완전히 질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드러내셨고 지금도 드러내고 계시는 사랑보다 악이 더 강하다고 주장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의 영향은 덜 눈에 띄지만 죄의 영향보다 훨씬 더 큽니다. 교황과 주교들, 모든 성직자, 수도자와 평신도를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는, 본향에서 그 신비가 완성될 때까지 교회가 겪는 이러한 상황 앞에서 드리는 신앙의 응답입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교회 안에 죄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학적인 믿음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마음대로 판단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특정 성직자나 몇몇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누가 더 훌륭하거나 또는 그렇지 못하거나 하는 것 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을 피상적인 것들에 가두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아니라,하느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느냐 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엄존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인간으로 오셨으며,당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우리네 일상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끊임없는 도움을 주심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불신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불신할 수도 있고,심오하고도 진실한 회개의 행동인 ‘내 탓이요’를 외치며 하루하루를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의심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교회를 의심하는 것, 교회의 거룩한 기원에 대해 의혹을 품는 것, 가르침과 성사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교회의 효과적인 역할을 의심하는 것은 바로 그분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또한 성령 강림의 실재를 온전히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7]

성인들의 통공은 지상에서 유기적으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교회를 구원의 성사, 곧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수단이며 표지로 삼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교회는 내적으로, 세례로 보편 사제직을 지닌 이들과, 거기에 더하여 성품성사로 직무 사제직을 받은 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구조를 이룹니다. 또한 교회는 외적으로, 보편 교회를 본떠 이루어지고 저마다 고유한 주교가 이끄는 개별 교회들의 친교 안에서 구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친교는 다른 교회적 실재들 안에서도 유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구조를 갖춘 교회는 사명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께 봉사합니다(“교회 헌장”, 8항 참조).

보편 사제직

교회에 들어오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표지로 왕이 되고 사제가 됩니다. 곧 성령의 도유로 사제로 축성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성품성사를 받는데, 이로써 그들은 다른 신자들, 곧 자신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일에서 형제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 공통의 신분과 거룩한 성직자들 사이의 이러한 구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총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 구원은 우리 각자의 바깥에서 오며 우리의 개인적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있으며,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질서로 유지되어 있습니다. 이 상호 관계는 사명의 수행을 위한 단순한 도덕적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이 지상에 현존하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교회 헌장”, 10항, 11항).

따라서 사제직은 교회 안의 어떤 특정한 봉사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저마다 고유한 카리스마를 받았으며, 스스로를 왕다운 겨레의 일원이자 그리스도의 사제 직무에 참여하는 이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성 대 레오, “설교”, 4,1: PL 54, 149 참조). 사제직은 남자와 여자, 평신도와 거룩한 성직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신분으로서, 세례로 받고 견진으로 굳건 해진 것입니다.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신자’라는 신분을 공통으로 지닙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이룬 이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나름대로 고유한 조건에 따라 참여하여 하느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실행하도록 소명을 받았다. 그들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품위 안에서 진정 평등하다.”[8] 보편 사제직은 모든 이가 세례로 받은 부르심, 곧 성덕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 가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행사됩니다.

유다교에서도, 이스라엘 주변의 종교들과 다른 많은 종교에서도 중개자 역할을 하는 이는 사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은 사제에게 자기 이름으로 그 일을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사제의 직무는 중개입니다. 곧 사람들을 하느님과, 하느님을 사람들과 결합시키고, 제사를 바치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신자들의 사제직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누립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에 영적 제물을 바치고, 세상을 하느님께, 하느님을 세상에 모셔 갈 수 있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서로 이어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보편 사제직에는 상승의 차원과 하강의 차원이 있습니다. 상승의 차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삶을, 그 삶에 담긴 모든 것과 더불어 하느님께 들어 높여 바칠 수 있게 해 줍니다.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미사 안에서, 우리의 작은 일과 희생은 영원한 가치를 얻게 됩니다. 훗날 천국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영광스럽게 변모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편 사제직의 하강의 차원은 사제가 하느님의 선물을 사람들에게 전해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를 들어 우리의 사도직을 통하여, 우리를 다른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합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자라도록 도울 때, 또는 혼인과 가정생활을 성화할 때 부모의 사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 때에도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사회의 한복판에서 활동하며 인간의 모든 고귀한 열망과 모든 올바른 일에 참여하는 동안, 여러분의 삶이 지닌 깊은 사제적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이끌어 가고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중개자가 되어야 합니다.”[9] 성품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성화 사명은 거룩한 성직자들의 성화 사명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며,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특히 당신 자녀들의 사도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들 각자가 “자기 일의 환경 안에서 모범과 말, 곧 대화를 통하여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끌며 사도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도직에서 영혼들을 그리스도교적 삶의 길로 이끌다 보면 성사의 벽에 이르게 됩니다. 평신도의 성화 직무는 교회의 이름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의 성화 직무를 필요로 합니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10]

보편 사제직에는 또한 그리스도의 왕직 사명이 포함됩니다. 이 사명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에게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주변을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게 합니다. 봉사는 그리스도인이 왕다운 품위를 행사하는 방식입니다. 이 왕직의 사명은 또한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하여 생각하신 것을 발견하고 실현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이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질서 있게 유지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분의 사제직은 이 둘의 상호 결합을 통하여 지상에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성직주의는 이 상호 질서가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성직주의는 성직자들이 자신과 관계없는 일과 사안에서 다른 신자들의 영역을 침범할 때, 또는 성품을 받지 않은 신자들이 성직자에게 속한 직무를 수행하며 직무 사제직의 영역을 침범할 때 나타납니다.

교회 안의 다양한 성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를 모든 민족 가운데에 선포하고 세워야 합니다. 지상에서 교회는 이 나라의 싹이며 시작입니다. 부활하신 뒤에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어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주며, 당신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게 하셨습니다(마태 28,18 이하 참조). 주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께 맡기신 바로 그 사명을 당신 교회에 남기셨습니다(요한 20,21 참조). 교회 초기부터 이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행하였으며(사도 8,4; 11,19 참조), 그들은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자주 자기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주님의 선교 명령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그 원천을 두고 있습니다.그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과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이 선교 파견 안에는 지상에서 교회가 지닌 세 가지 직무가 담겨 있습니다. 곧 예언자직(munus propheticum: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 사제직(munus sacerdotale: 성사와 은총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현존하게 하고 전하는 것), 왕직(munus regale: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하느님께 이끌어 가고 성덕 안에서 자라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모든 신자가 이 같은 사명을 함께 나누지만,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어떤 성사와 카리스마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명과 연결된 특정한 직무에 맞게 형성하고 그에 필요한 능력을 줍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보편 사제직을 지닌 이들과 직무 사제직도 함께 지닌 이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질서를 갖추고 있어서, 지상에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중개,그리고 모든 이가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총의 선물과 힘과 빛을 현존하게 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방식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품성사를 받았기에, 다른 모든 신자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하는 직무 사제직을 지닙니다. 성품성사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입니다. 성품성사의 둘째 품계를 받은 이들은 주교들을 직접 돕는 사제들입니다. 성품성사의 셋째 품계인 부제품은 한 그리스도인을 봉사자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게 하여, 말씀 선포와 자선 활동,그리고 몇몇 성사의 거행에서 주교와 사제들을 돕게 합니다.

세상을 하느님께 이끌어 가는 사명과 관련하여, 이 과업과 결부된 두 가지 큰 생활 신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그 안에서부터 하느님께 이끌어 가는 고유한 성소를 지니는데,그들이 바로 평신도입니다. 평신도들은 자신의 삶과 말하자면 한데 엮여 있는 현세의 일들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고 이 일을 합니다(“교회 헌장”, 31항 참조).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므로, 그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의 사명에 참여합니다.[11] 평신도들은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자신의 삶을 그 모든 일과 함께 영적 제물로 봉헌할 때 그리스도의 사제직 사명에 참여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과 말의 증거로 세상에 선포할 때 그리스도의 예언자직 사명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극기와 자기 삶의 성덕으로 자기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죄를 이길 힘을 그리스도께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왕직 사명에 참여하며,인간의 현세 활동과 사회 제도들에 도덕적 가치가 스며들게 합니다.

다른 이들은 세속의 실재와 활동에서 물러나는 고유한 성소를 지니며,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누리게 될 생활 조건을 닮은 특별한 생활 신분에 따라 살아갑니다(그들은 혼인하지 않고 흔히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로 살며,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이전의 삶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생활 신분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은 복음적 권고, 곧 정결(독신 또는 동정), 청빈, 순명을 서원함으로써 특별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봉헌됩니다. 봉헌 생활은 교회가 인정한 생활 신분으로서,그리스도와 형제들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 주고 하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증언함으로써 교회의 사명에 참여합니다.[12] 구체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생활 신분을 통하여 다른 모든 이에게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한 거처를 두고 있지 않음을 일깨워 주고,모든 인간적 성취가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변모되어야 함을 공적으로 증언하며, 자신들이 물러난 활동과 일들의 바깥에서 마치 끌어당기듯이 세상을 하느님께 이끌어 갑니다(“교회 헌장”, 44항; “수도 생활 교령”, 5항 참조).

평신도와 수도자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세상을 하느님께 이끌어 갑니다. 평신도는 안에서부터,하느님의 안배에 따라 창조 세계의 발전을 증진하면서 그렇게 하고(창세 2,15 참조), 수도자는 바깥에서부터, 창조 세계를 그 완성으로 끌어당기면서 그렇게 합니다. 수도자들은 자신의 생활 방식으로 그 완성을 상징적으로 앞당겨 보여 줍니다. 평신도에게는 참행복의 정신 없이는 세상을 하느님께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수도자들이 일깨워 줄 필요가 있고, 수도자에게는 창조 세계를 하느님께서 생각하신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인간의 본래 소명이라는 것을 평신도들이 일깨워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양쪽 모두 친교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합니다.봉헌 생활은 또한 자선, 구호, 사회 복지 활동을 통하여 세상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활성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며, 이러한 일에 너그럽게 헌신합니다.

또한 교회의 삶 안에서는 공동의 사명을 수행하는 많은 길과 방식이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20세기에는 많은 실재, 곧 여러 운동과 새로운 수도 공동체, 그리고 더 최근의 다른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이들 모두가 저마다 고유한 카리스마로 복음화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의 기원이며 모범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이고, 교회의 창립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한 몸 안에서 다시 일치시키시기 때문이며,성령께서 신자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치는 신자들이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사들을 거행하며, 같은 교계 제도 안에서 결합되어 있고, 공동의 희망과 같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 세워지고 조직된 사회로서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합니다(“교회 헌장”, 8항 참조).오직 가톨릭교회 안에서만 구원 수단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새 계약의 모든 보화를 오로지 베드로를 으뜸으로 하는 사도단에게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일치를 주셨고,그 교회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이 일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은 교회에 상처를 입히고,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복음화를 늦춥니다.

가톨릭교회와 갈라진 상태에서 태어난 이들을 그대로 이교자나 이단자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교회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어 가톨릭 일치로 이끄는 성화와 진리의 요소가 많이 있으며, 성령께서는 그 교회와 공동체들을 구원의 도구로 쓰십니다. 그 힘은 그리스도께서 가톨릭교회에 맡기신 은총과 진리의 충만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13]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과 기도와 그 밖의 영적 혜택에서 어느 정도 친교를 이루고 있으며, 성령 안에서 어떤 참된 결합까지 이루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15항). 우리는 일치 안에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도움으로써,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부수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는 사랑을 북돋움으로써, 하느님의 집을 다른 이들이 더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으로 만듦으로써, 그리고 교황과 교계에 대한 공경과 존중 안에서 자라고 그들을 도우며 그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의 과업입니다. 이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입니다(요한 17,21 참조). 교회 일치 운동은 기도, 마음의 회개,형제적 상호 이해, 신학적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은 교회 일치 운동을 이루는 활동 가운데 하나로, 이른바 영적 일치 운동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 기도 주간은 1908년 미국에서 성공회 소속의 폴 왓슨(Paul Watson)이 시작하였는데, 그는 뒷날 가톨릭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교황 비오 10세와 베네딕토 15세는 이 운동을 칭찬하고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여기에 동참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기도 주간은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1월 25일까지 지냅니다.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여러 정교회와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도 이 주간을 지냅니다. 어떤 곳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기도 모임이나, 저녁기도와 같은 전례 기도까지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정해진 여드레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 일치를 위하여 이 공동의 지향으로 바치는 개인 기도입니다.

미겔 데 살리스(Miguel de Salis)

기본 참고 문헌

• “가톨릭 교회 교리서”, 748-945항.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 147-193항.

•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년 5월 25일.

[1]“가톨릭 교회 교리서”, 777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 147항 참조.

[2]“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 149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778항 참조.

[3]“가톨릭 교회 교리서”, 782-786항.

[4]“가톨릭 교회 교리서”, 787-795항.

[5]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길”, 755항.

[6]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131항: 저는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도신경을 낭독하며 교회의 거룩한 기원에 대한 제 믿음을 표현해왔습니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 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저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라는 한 마디를 그 말씀 앞에 덧붙입니다. 저의 이런 습관을 얘기하면 누군가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과 저의 죄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입니다.”

[7]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131항.

[8]“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 177항. [역주: 스페인어 원문에는 189-191항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인용된 본문은 “요약” 177항이다.]

[9]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편지”, 로마, 1955년 3월 28일, 4항.

[10]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과의 대화”, 69항. “참다운 거룩함은 거룩함을 담은 잔에서 흘러넘쳐서 그 넘치는 거룩함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다른 이들의 영혼을 채웁니다. §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른 이들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거룩해집니다. 그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정신이 전파되고 있습니까? 이것을 매일 매일 생각하십시오.”(“사랑의 담금질”, 856항).

[11]“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 189-191항.

[12]“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 192항 이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과업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왕(王)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회와 떨어져서 세속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범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우리에게 되새기도록 요청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제직의 직무를 맡기십니다.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곳, 각자가 일하는 세속의 일터에서 올곧게 계속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공장에서, 실험실에서,농장과 무역 현장에서, 그리고 대도시의 거리와 산길에서 말입니다.”(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105항).

[13]“가톨릭 교회 교리서”, 819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