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불의가 가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한 삼위일체의 너그러운 사랑,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사 안에 현존하는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 곧 내세의 생명을 시작하시고 이를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신비는 우리 구원의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보내신 거룩하고 자녀다운 삶으로, 원죄와 모든 사람이 잇달아 지은 개인적인 죄들로 일그러진 인간 현실을 성부의 사랑으로 다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회복시키시고 악마의 권세에서 구해 내십니다.
그러나 이 구속의 현실은 오직 그분의 파스카 신비(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성부 곁 하늘로 오르심)를 통해서만 결정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의 신비는 흔히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곧 그분의 파스카 신비에 돌려집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지상의 단계와 영광의 단계를 아우르는 그리스도의 삶 전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십자가의 의미.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권력에 넘기며 처형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까닭은,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산헤드린) 앞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곧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할 권한을 주신 분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은 신성 모독으로 여겨졌고, 그리하여 최고 의회는 그분의 죽음을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단죄는 그 이전 유다 백성의 구원 역사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이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위대한 영웅적 업적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커다란 반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백성은 여러 차례 하느님을 저버렸고, 그분께 받은 거룩한 율법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주 부당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하는 역사이며, 보편적 소명을 지닌 역사입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며 세상에 당신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몇몇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랐을 뿐,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배척하고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배척하여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학대하기에 이른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가장 신비로운 면이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악으로부터 당신 아드님을 보호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분을 죄인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을 허락하셨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00항).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당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또 아버지께서 구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수난과 죽음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09항). 그분께서는 그 부당한 수난과 죽음에 당신 자신을 내어 맡기셨습니다. 원수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이 누구이시며 성부와 어떤 관계인지를 용감하게 고백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굴욕적이고 잔혹한 죽음을 선고받으셨고, 그렇게 당신을 단죄한 이들의 불의를 몸과 영혼으로 겪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겪으시고 받아들이신 그 불의 안에는 인류의 모든 불의와 죄도 담겨 있었습니다. 모든 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 거부는 예수님께 그토록 잔인한 죽음을 선고한 일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죄인, 곧 모든 사람은 참으로 구세주께서 겪으신 고통의 원인이며 도구이다”(117항).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불의가 가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모든 죄와 하느님께 대한 모든 모욕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죄를 당신 어깨에 ‘짊어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교회는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공통된 바탕 위에서 이렇게 대답해 왔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마음의 의로움 안에서 우리 죄를 없애고 지워 버리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죄를 없애셨을까요? 사람들이 지은 죄의 열매인 그 고통들을 견디어 내심으로써 죄를 없애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순명과 사랑으로 일치하여, 의로움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그리고 죄인이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그를 사랑하는 이, 사랑으로 모욕을 용서하려는 이의 애덕으로 그 고통을 견디셨습니다(루카 22,42; 23,34 참조). 한 가지 예가 이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언짢은 기분으로 자신을 돌보는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 있을 때 그런 고통은 애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상처를 주는 그분의 선익을 계속 추구하게 됩니다. 모욕은 의롭고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 안에서는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기에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이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셨습니다. 예로 든 어르신은 젊었을 때 행한 좋은 일들 때문에 자신을 돌보는 이들의 사랑을 받을 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어떤 특별한 이유로 사랑하던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모질게 박해하였던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갈라 2,20 참조)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들을 당신의 죽음과 함께 우리를 위하여 성부께 바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잘못을 언제나 용서받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희생을 떠받쳐 주신 성부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이처럼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근본적인 것은 그분을 고발하고 단죄한 이들의 불의한 행위가 아니라, 그 상황 앞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응답, 곧 올곧음과 자비로 가득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응답은 동시에 삼위일체의 행위였습니다. “이 희생 제사는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서 몸소 주신 선물이다. 바로 성부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신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유로이, 사랑으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기 위하여 성부께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는 봉헌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14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한 삼위일체의 너그러운 사랑,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본질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열매. 그 열매는 무엇보다도 죄의 제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거나, 우리 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죄가 저절로 용서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소풍을 가거나 들길을 산책하다가 독사에게 물리면, 우리는 곧바로 독을 없앨 해독제를 찾을 것입니다. 독은 죄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해를 입은 이를 파괴합니다. 해독제의 역할은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파괴에서 우리를 구해 내는 것이며, 해독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독을 무력화하는 무언가를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죄의 ‘해독제’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바로 불의와 모욕에 대한 응답으로 현존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독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솟아난 그 희생적인 사랑이 바로 죄를 극복하고 이겨 내며 없앨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죄와 그 해로운 결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죄가 끼치는 해악을 몸소 견디어 내심으로써 당신 안에서 만들어 내신 그 ‘해독제’, 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그 해독제를 받아들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죄를 씻어 줍니다. 고해성사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얻어 줍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정화하고 굳세게 합니다…. 이처럼 성사 안에 현존하는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를 끝없는 새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곳에는 어떠한 악도, 어떠한 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다른 열매들도 있습니다. 십자가상 앞에 서면 우리는 십자가가 죄의 해독제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힘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며, 그렇게 인간적 충만함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하느님과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인간적 충만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 부활에 참여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성경과 전례의 표현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신학적 의미를 밝혀 보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종교 문화 안에서 쓸 수 있었던 범주와 개념들을 사용하였는데, 이것들이 바로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가) 계약의 제사, 나) 죄를 위한 속죄와 화해와 보속의 제사, 다) 인간을 속량하고 해방하는 행위, 라) 우리를 의롭게 하고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행위.
성경을 읽거나 전례에 참여할 때 자주 만나게 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는 이 여러 방식을 살펴봅시다.
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 생명을 하느님께 바치심으로써 새 계약을 세우셨습니다. 새 계약이란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하는 새롭고 결정적인 형태로서, 이사야(이사 42,6)와 예레미야(예레 31,31-33)와 에제키엘(에제 37,26)이 예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맺으신 새 계약이며,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나)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속죄의 가치, 곧 죄를 씻고 정화하는 가치를 지닙니다(로마 3,25; 히브 1,3; 1요한 2,2; 4,10). 또한 죄를 위한 화해와 보속의 가치도 지닙니다(로마 3,25; 히브 1,3; 1요한 2,2; 4,10). 우리 인간이 죄로써 하느님께 거부하였던 사랑과 순종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순명으로 성부께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께서는 성부의 마음을 얻으시고 그 모욕들을 보상하셨습니다.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속량하고 해방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피의 값, 곧 당신의 고통과 죽음의 값으로 우리의 자유를 사셨으며, 그렇게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고(1베드 1,18) 악마의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악마의 종이 됩니다.
라) 특히 성 바오로의 서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 곧 하느님께 죄를 지어 잃어버린 의로움을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그렇게 우리를 그분과 화해시킨다는 것을 읽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우리 의화의 원인입니다. 성령께서 다시 우리 마음 안에 머물려고 오시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다시 현존하시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
“저승에 가시어”.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뒤, 그리스도의 몸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서 멀지 않은 새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한편 그분의 영혼은 “저승에 가셨습니다”. 곧 그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의인들이 처해 있던 상태를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한 채, 결정적인 구원을 이루실 메시아 임금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히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참으로 돌아가셨음을 드러냅니다. 그분께서 저승에 가신 일에는 구원의 효과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그 의인들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어,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돌아가신 지) “사흗날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영혼과 육신은 그분 신적 위격의 영광으로 온전히 변모되어 다시 결합하였습니다. 영혼이 다시 육신을 취하였고, 영혼의 영광이 온전히 육신에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상 생명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몸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 몸이며 수난의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는 영광스러운 몸의 특성을 지니고 이미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9항).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속았거나 부활을 지어냈을 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수많은 무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의 많은 제자는 그분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토마스 사도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거짓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성 바오로가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바오로 자신은 하느님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1코린 15,14.15)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에게는 그런 일을 할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기에 그분의 부활을 온전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 베드로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용감하게 대답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사도 5,29-30.32).
부활의 신학적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하나를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죄를 없애시고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셨듯이,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 곧 내세의 생명을 시작하시고 이를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모든 육체적·영적 고통은 그분의 부활로 몸과 영혼 모두에서 행복과 완전함으로 바뀝니다. 그분 안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생명, 그분의 사랑, 그분의 행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그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우리를 당신 은총, 곧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요 벗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충실하다면 삶의 마지막에 당신의 영광도 나누어 주실 것이며, 우리 또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1요한 3,14 참조). 곧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상태에서 의화의 은총과 하느님 자녀 됨의 은총으로 옮겨 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힘으로 하느님께 한없이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이 삶이 자라나는 가운데 우리 인간성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 승천으로 그리스도의 사명, 곧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죽을 육신을 지니고 우리 가운데 파견되신 사명이 끝납니다. 부활하신 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새 생명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의 양성을 완성하기 위하여, 때때로 제자들 가운데 계속 나타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현존은 승천하신 날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계신 하늘로 돌아가시지만, 여러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며,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성사적 방식으로 머물러 계십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보편적 중개자로서 당신의 직무를 계속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인성을 지니시고 하느님 아들의 영원한 영광 안에서 다스리시며,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성부께 전구하시고,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시며, 언젠가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곳, 곧 당신 곁에 이르리라는 희망을 주신다”(“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2항).
또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가) 하늘의 영광에 눈길을 두고 살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또한 이 땅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며(히브 13,14), 인간 현실을 성화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북돋아 줍니다.
나) 믿음으로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며 끊임없이 당신 성령의 은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는 그분께서 맡기신 복음화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곧 모든 영혼을 그분께 인도하고(마태 28,19 참조), 모든 인간 활동의 정점에 그분을 모셔 드려(요한 12,32 참조), 그분의 나라가 실현되게 하는 것입니다(1코린 15,25 참조). 게다가 그분께서는 감실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오늘도 살아 있는 파스카 신비
앞서 말하였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라자로의 경우처럼 이전의 삶으로 단순히 돌아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고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 이상 시간의 덧없음에 매이지 않는 생명, 하느님의 영원 속에 잠긴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만을 위하여 얻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바로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것입니다.
파스카 신비는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울려 퍼집니다. 성 바오로는 콜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성 바오로의 이 말씀에 관해서는 다음의 해설이 흥미롭습니다. “언뜻 보면 사도가 지상 현실을 경시하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곧 고통과 불의와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잊고 하늘의 낙원을 미리 살라고 초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대한 생각은 일종의 소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의 이 말씀이 지닌 참된 의미를 파악하려면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 놓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위에 있는 것’과 경계해야 할 ‘땅에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피해야 할 ‘땅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이며,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3,5-6). 우리 안에서 물질적 재화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망과, 모든 죄의 뿌리인 이기심을 죽여야 합니다”(베네딕토 16세, 일반 알현, 2011년 4월 27일).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옛 인간’을 죽이고,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좋은 것들을 입는 일입니다. 성 바오로 자신이 그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2-14). 따라서 하늘의 좋은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데 걸림돌일 뿐인 현재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세례 성소, 곧 우리를 그분의 생명과 은총에 참여하게 하는 그 성소를 자주 새롭게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우리의 일이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시리라고 그분께 희망을 두며, 모든 이에게 애덕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고, 은총의 원천인 성사에 자주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전에는 죄의 종살이를 하며 수많은 작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삶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으로 변화되어 가며, 동시에 마지막 때에 완성될, 하느님 뜻에 따른 세상의 변화에 우리도 작은 모래알 하나를 보태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과 활동을 통하여 지상 도성에 참된 인간다움을 북돋는 새로운 얼굴을 부여합니다. 연대, 인간의 존엄, 평화와 가정의 화목, 정의와 사회 발전, 우리가 사는 환경을 돌보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을 그가 역사를 이루어 가는 세상에서 떼어 내지 않은 채 새롭게 하였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파스카가 가져온 이 새 생명의 빛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파스카의 빛은 우리 세상에 스며들어야 하며, 우리의 일상적인 증언을 통하여 진리와 생명의 메시지로서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베네딕토 16세, 일반 알현, 2011년 4월 27일).
안토니오 두카이(Antonio Ducay)
기본 참고 문헌
- “가톨릭 교회 교리서”, 595-667항.
- 성 요한 바오로 2세, Creo en Jesucristo. Catequesis sobre el Credo (II)(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사도신경 교리 교육 II), Palabra, Madrid 1996.
보충 참고 문헌
- Antonio Ducay, Jesús, el Hijo Salvador(구원자이신 아드님 예수), Rialp, Madrid 2015(특히 제5-6장).
- Vicente Ferrer Barrientos, Jesucristo nuestro Salvador(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Rialp, Madrid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