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동안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 복음서는 오랜 편찬 과정의 결실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과거의 한 인물로 소개하는 책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살아 있는 오늘의 말씀이며, 그 안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복음”이라는 낱말의 가장 오래된 문헌적 증언은 성 바오로에게서 나옵니다. 비록 그 용어 자체는 그보다 앞서 있었지만 말입니다. 사도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뒤에 이 말을 별다른 설명 없이 사용합니다(1테살 1,5; 2,4; 갈라 2,5.14; 1코린 4,15; 로마 10,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복음”이라는 말에 대개 보어가 뒤따르는데,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고대 —호메로스나 플루타르코스의 글에서— “에우앙겔리온(복음)”이라는 말은 승전 소식을 가져온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 또는 좋은 소식에 대해 신들에게 바치는 감사 제사를 가리키는 데 쓰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온갖 은전을 통틀어 “복음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 황제에 관한 한 비문에서도 확인됩니다. “그 신의 탄생일은 세상을 위한 좋은 소식들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역본인 칠십인 역(Septuaginta)에서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를 뜻하는 동사 에우앙겔리조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산 위의 계절처럼, 평화의 선포라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이의 발처럼, 좋은 것들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이처럼. 내가 너희 구원이 들리게 하리니,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의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리라!’ 하고 말하는 것처럼.”(이사 52,7-8 [칠십인 역]; 이사 61,1-2; 시편 96,2.10 참조)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왕권을 선포하고 당신 말씀으로 메시아 시대를 여는 그 사자, 곧 전령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서의 편찬과 진정성
복음서들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마르 1,14) 다니셨다고 전합니다. 그 좋은 소식이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현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좋은 소식의 전달자이실 뿐 아니라 그 메시지 자체가 바로 그분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마르 16,15)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동안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었으며, 이를 통해 구약의 약속들이 그분 안에서 충만히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적 사명에서 “복음서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는 선포된 복음을 글로 담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유일한 복음에 대한 네 가지 증언, 곧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복음서가 전해져 왔습니다. 이 네 이야기는 오랜 편찬 과정의 결실이며 보통 세 단계로 나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붙여진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그 독자적 성격뿐 아니라 사도적 선포와의 연관성을, 심지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도 보여 줍니다.
실제로 네 복음서의 짜임새는 사도적 선포(케리그마)의 짜임새와 같은데, 이는 예를 들어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에 요약되어 있습니다(사도 10,37-43).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갈릴래아에서 선포하시며 기적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그 거룩한 도성에서 사목하신 뒤 수난과 죽음에 이르십니다. 부활하신 뒤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아버지 곁 하늘로 승천하시며, 그곳에서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 이들은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이 짜임새 위에 각 복음사가는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씁니다.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에 유년기 이야기를 배치하고, 요한은 예수님의 선재(先在), 곧 육이 되신 로고스를 보여 주는 머리말을 둡니다. 마르코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필요성과 베드로의 역할을 부각시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활동을 큰 설교들 중심으로 제시합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표징들(기적들)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원을 점차 드러내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의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보여 줍니다.
역사적 신빙성
복음서의 역사적 진실성을 논하려면 먼저 그 문학 유형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목격자가 기록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동시대의 연대기가 아닙니다. 복음서는 사도적 전승에 충실한 이야기이며, 그 전승은 다시 그리스도의 삶과 선포에 충실합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단순히 되풀이하거나 그분께서 하신 일을 세세히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전하였습니다. 이는 성 바오로가 그 자신이 전승으로 받아 지녔던, 가장 원초적인 신앙 고백을 전하는 1코린 15,3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1코린 15,3) 곧 사도적 선포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일어난 논란의 여지없는 역사적 사건을 전하되, 그것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구원적 의미 —“우리의 죄 때문에”— 를 지니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글들이 예고한 대로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서술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의 진실을 가리키며, 사도들이 목격하고 선포한 바를 가리킵니다. 그 목적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성경이 예고한 대로 구원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 들에서, 복음사가들이 부여한 의미를 배제한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사실들 —고대의 이야기에서는 어차피 이룰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 실재는 각 복음사가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에 전해진 역사적 사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이야기가 가르침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 서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시대마다 지녔던 역사 개념에 따라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성이 검토되어 왔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역사를 고대 문헌에 대한 역사 비평에 근거한, 객관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서술로 보는 개념이 자리 잡으면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구분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로써 역사가들이 재구성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치는 바가 분리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분리가 있을 수 없지만 —역사적 예수님은 바로 교회가 충실히 전하는 그 인격과 가르침을 지니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제기하는 어려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어떻게 예수님께 다가갈 것인가 하는 물음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셨고 지금도 참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역사 속 인물이시며, 그분의 구속 사업 역시 인간의 역사 속 행위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가르치신 대로, 만일 예수님이 하나의 관념이나 이념이라면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그노시스(영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 이야기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인성을 더 잘 알기 위해서도 필요한 요건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려면 복음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알기 위한 으뜸가는 원천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이 네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성경 외의 다른 역사적 증언들도 전해져 왔습니다. 예를 들어, 시대 전환기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은 복음서의 서술을 뒷받침하거나 그 배경을 밝혀 주는 귀중한 자료를 드러내었습니다.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들, 유다교 성경의 아람어 번역본들, 유다교의 구전 전승과 그 전승 방식, 라삐 문헌들은 그 시대의 종교적 생동감과 거룩한 문헌이 사용되던 방식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유다계 로마인 역사가 플라비오 요세푸스가 예수님에 대해 남긴 증언과 이교 문헌들(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플리니우스)의 다른 증언들, 그리고 그레코로만 수사학 문헌에서 드러나는 정보, 헬레니즘 교육에 대한 연구나 그리스 사상 학파들의 영향 등도 복음서에 나타난 역사적 측면들을 더 잘 규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주관적이라는 비난에 맞서, 앞서 언급한 외적 자료들은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적 신빙성을 보장하는 일련의 기준들로 보완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불연속성의 기준. 당대 유다교와 맞지 않고 초대 교회나 복음사가들이 지어냈다고 볼 수 없는 표현과 사실들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 “사람의 아들”, “아빠”, “아멘”, 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세례, 사도들의 결점 등이 그러합니다.
2) 다중 증언의 기준. 예수님의 모습과 선포와 활동 가운데, 모든 복음서와 신약성경의 다른 문헌들 또는 그 밖의 문헌들에서 증언되는 특징들은 진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과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정치적 유형의 임금-메시아로 인정받기를 거부하신 것, 하느님 나라의 선포, 그분의 치유 활동과 기적들이 그러합니다.
3) 일치(정합)의 기준. 다른 기준으로는 역사적이라고 확립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선포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 및 수립에 관한 그분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바와 부합하는 요소들은 진정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기도(주모경), 비유들, 참행복(진복팔단)이 그러합니다.
4) 필연적 설명의 기준.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일련의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밝혀 주는 사건들 역시 진정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활동 초기의 성공,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제자들에게 사사로이 베푸신 가르침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기준들에 더하여, 서술된 어떤 것이 사실일 개연성이 높음을 보여 주는 이른바 “단서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의 방석을 베고 주무셨다는 세부 사항이나, 어떤 일이 예를 들어 “예리코 가까이에서” 일어났다는 언급 같은 것들은, 그 이야기 뒤에 목격자의 증언이 있음을 보여 주는 단서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서가 신앙의 증언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복음서가 예수님을 신학적이고 구원론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그분의 모습을 부풀려 역사적 실재를 왜곡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의 이야기 안에서 다 소진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 요한이 쓰듯이, 복음서에 담기지 않은 다른 많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20,30-31; 21,25).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며, 그분의 모습은 온전히 파악하려는 인간의 그 어떤 시도도 뛰어넘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
비록 불완전 할지라도, 복음서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신 바일 뿐 아니라, 교회 역사를 통해 —특히 성인들을 통해— 제시되고 발전되어 온 그리스도의 다른 모든 모습의 토대가 됩니다. 그 모든 모습은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모습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 마태오는 예수님을 온전한 위엄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하는데,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1,20; 27,54 참조). 그분은 또한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구약 예언자들의 예고가 이루어지는데,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이나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되풀이되는 데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1,22-23; 2,5-6.15.17-18.23; 3,3-4 등).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메시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는” 새 백성을 이루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21,43). 그 새 백성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은 스승이시지만, 무엇보다도 잉태되시기 이전부터(1,23)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이시며, 세상 끝날까지 당신 백성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18,20; 28,20). 마지막으로 그분은 이사야가 예고한 주님의 종이시며, 당신 말씀과 기적으로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십니다(8,16-17; 12,15-21).
성 마르코에게도 당연히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고된 메시아이시지만,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본문들보다는 오히려 약속된 메시아의 업적을 실제로 행하시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정치적 성격의 해석을 피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업적으로 혜택을 받은 이들에게 침묵을 명하시어, 그분의 메시아성이 현세적인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빛 안에서 이해되게 하십니다(1,44; 5,43; 7,36; 8,26). 그래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는 데 즐겨 쓰신 칭호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2,10.28; 8,31.38 등). 이 칭호는 하늘에서 오는 어떤 천상적 존재,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위로부터 와서 모든 민족에 대한 권세를 받으리라고 예고하는 다니엘서의 환시를 떠올리게 하며(다니 7,13-14), 메시아의 초월적 신원을 보여 줍니다. 또한 성 마르코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이야기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렇게 불리며(1,1),세례와 거룩한 변모 때에 아버지께서 이를 선포하시고(1,11; 9,7), 십자가 곁에서는 백인대장이 이를 고백합니다(15,39).
성 루카는 예수님이 탁월한 예언자이심을 부각시킵니다(1,76; 4,24; 7,16.26; 13,33; 24,19). 그분처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영에 이끌렸듯이,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3,22),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시며(4,1), 갈릴래아로 향하시어 사명을 시작하도록 재촉받으십니다(4,14.18). 세 번째 복음사가에게 예수님은 또한 구원자신데,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예언자들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며(1,47.69.71.77; 2,11.30; 3,6 등), 이는 특히 약한 이들과 죄인들을 향한 자비의 몸짓과 같은 구원의 행위들 안에서 드러납니다(7,50; 8,48.50; 18,42; 19,9-10). 아울러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 이 칭호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발음하지 않기 위해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쓰였습니다. 동시에 이는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넬 때의 존칭이기도 하였습니다. 성 루카는 예수님을 가리켜 이 칭호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탄생에서부터 부활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까지 이어지는 그분의 신적 신원을 보여 줍니다(2,11; 5,8.12; 7,6 등).
성 요한에 따른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 약속된 메시아이시며 또한 예언자(4,19; 6,14)요 가르치시는 스승(라삐)이십니다(1,38.49; 3,2 등; 6,3.69; 7,14.28; 8,20). 그러나 넷째 복음서에서는 이 계시가 더욱 깊은 신학적 심오함을 지닙니다.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성 요한은 그분이 “아드님”, 곧 외아드님(1,14.18)이심을, 다른 모든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유일하게 참된 아드님이심을 강조합니다(20,17). 실제로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십니다(10,30; 5,19-21.23.26; 14,11).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수님은 선재하시는 분이십니다(1,30; 8,58). 그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거처를 정하셨습니다(1,1-14). 그분은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이신 로고스이시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는 분이시고(1,1-3),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자 인류에게 파견되신, 하느님의 마지막이며 결정적인 말씀이십니다(17,25). 그분은 구약성경에서 오직 하느님께 돌려지던 몇몇 특징들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시요(6,35.51), 세상의 빛이시며(8,12), 문(양들의 문)이시고(10,7.9), 착한 목자이시며(10,11.14), 부활이요 생명이시고(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14,6), 포도나무이십니다(15,1.5). 그렇기에 그분은 술어 없이 절대적인 의미로 “나는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로써 당신의 신적 신원을 나타내십니다(8,28.58; 18,5). 그러나 그분은 또한 참으로 사람이신 “사람의 아들”이시며, 죽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고(1,51; 3,13; 6,62),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1,29.36; 19,14 참조).
어떤 경우든, 복음서는 예수님을 과거의 한 인물로 제시하는 책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살아 있는 오늘의 말씀이며, 그 안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그렇기에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이렇게 권고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대는 복음서 안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아와 함께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Iesus Christus, heri et hodie, ipse et in sæcula!’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영원히 한결같으신 분이십니다.”(“사랑의 담금질”, 8)
후안 차파
기본 참고 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Dei Verbum), 18-19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4-127항
추천 도서
—나바라 대학교 신학부, “복음서 입문” 및 각 복음서 “서론”, “성경. 신약성경”, 팜플로나: Eunsa, 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