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 다니면서, “반쯤 눈먼 자인 저는 항상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왜 사제가 되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요? 성모님을 향한 그의 기도는 지속적인 성체조배로 이어졌다. 그는 신학교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그는 감실이 내려다 보이는 위층 발코니에서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던 1924년 11월, 로그로뇨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아버지가 돌연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지쳐서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계셨습니다.” 크나큰 슬픔으로 가슴이 아팠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에스크리바 집안은 이제 경제적으로 예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1925년 3월 28일, 그는 아버지를 애도하면서 - 신학교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기둥의 성모 대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사랑하는 성모님의 발아래서 그렇게나 자주 기도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 그리고 친한 친구 몇 명이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는 아버지를 위한 위령미사를 겸해 봉헌됐다.
그 순간부터 미사는 더욱 깊숙이 그의 삶에서 중심이 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신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계속 분투하십시오. 그래서 거룩한 희생제사가 실제로 여러분 내적 삶의 중심이자 뿌리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하루가 온통 하느님께 대한 흠숭으로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례했고, 또한 새로 준비할 미사의 연장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온종일이 열망 넘치는 흠숭의 실천이자 성체조배로 거듭날 것이며, 여러분의 직장 일과 가정생활도 주님께 올리는 봉헌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