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가난한 아르헨티나 한인들의 친구"... 오푸스데이 한인 신부 편지.
"교황, 아르헨티나서 한국 음식 맛있게 먹어"
홍지영 오푸스데이 신부님이 weekly.chosun.com에서 4월 25일에 출판하신 글.
14살 때인 198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을 간 후 나는 곧장 한인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된 일이어서 첫 만남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20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신부님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 안에서 ‘대리구’라는 지역의 담당 보좌주교였다. 당시 한인성당은 그의 관할 안에 있기도 했고, 또 그의 고향 동네에 있는 이민자 성당이라 그는 항상 우리 성당을 기쁘게 방문했다.

1990년대 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인 공동체는 대부분 1980년대에 이민 온 사람들이 많았고,이곳의 정치·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어려웠다. 한국에서 수직으로 땅굴을 파고 계속 들어가면 아르헨티나가 나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처럼, 지구 반대편 정확히 12시간의 시차가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한인들은 옷가게나 작은 공장 등을 비롯한 여러 소일거리로 조금씩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이런 한인들에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통하는 베르고글리오 주교님의 방문은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베르고글리오 주교님이 한인성당에 올 때는 언제나 44번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지금도 그가 버스에서 내려와 성당으로 걸어오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의 구두는 항상 낡아 있어서 밑창이 다 드러나 있었다.
지금이야 K-컬처니 K-푸드니 해서 한식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30년 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당연히 아르헨티나인인 베르고글리오 주교님도 한식을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
한인성당 교우들은 주교님이 올 때면 언제나 한국식 음식과 전통 다과를 내놨고, 주교님은 입에도 맞지 않았을 법한 한국 음식을 항상 맛있게 먹었다. 그는 음식에 깃들어 있는 한국인들의 혼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우리가 만든 음식을 가식 없이 먹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려 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 신학을 접한 뒤 영성 강화를 최우선으로 삼는 ‘오푸스데이(신의 사역)’ 사제가 됐다. 베르고글리오 주교님이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임명됐을 때 나는 로마 오푸스데이 신학교에 입학했고 200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지금은 오푸스데이가 운영하는 아우스트랄 의과대학교에서 영성신학과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빈민들이 지방이 아닌 대도시 곳곳에 빈민촌을 지어 살고 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교구를 담당할 때 교구 내에 빈민사목부를 따로 만들어 담당 보좌주교님을 배정했다. 언제나 그는 가난한 자들을 우선했다.
2005년 담당 학생들과 함께 빈민 봉사활동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변두리의 판자촌에 있는 성당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신학교 근처에 판자촌과 빈민촌이 있었는데, 학생들과 주말에 방문하여 봉사활동과 선교캠프 등을 진행했었다.
그 어느 날은 추기경님이 티셔츠를 입고 다른 청년들과 함께 짐을 나르고 계셨다. “추기경님, 웬일이십니까?”라고 묻자, “페페(판자촌 본당 주임신부) 신부가 피곤해 보여서 휴가를 보냈네. 오늘은 내가 본당 신부야. 와 줘서 고맙네. 뭐 해?안 돕고?”라고 하셨다. 그는 권위보다 친근감을 내세워 신자들에게 다가갔다.
한인성당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사목생활을 하던 나는 5년 동안 1년에도 여러 차례 교구 행사 전후에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철저하게 추기경은 에미넨차(Eminenza),주교는 에첼렌차(Eccellenza)로 불러야 하지만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달랐다.
첫 만남부터 ‘추기경님’이란 호칭 대신 그보다 더 부르기 쉬운 ‘몬시뇰’ 또는 ‘파드레(신부님)’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리고 스페인어에서 존대에 해당하는 ‘우스텟(usted)’ 대신에 반말이라고 할 수 있는 ‘보스(vos)’라는 호칭을 써도 된다고도 했다.
물론 나는 동양인이라는 핑계로 그냥 우스텟을 고집했다. 교황은 난처한 상황에서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남미에서 외국인 사제로 겪는 어려움을 넘길 수 있도록 자주 도와줬다. 특히 나를 비롯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 소속으로 있는 문한림 신부 등 두 명의 한국인 신부를 많이 아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예수회 출신이고, 나는 오푸스데이 소속 사제였다. 신학적 차이로 인해 다른 점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추기경은 교구 안의 모든 단체, 모든 신자를 위해 열정적이면서도 너그러운 모습으로 격려했다. 그는 권위 있는 사제가 아닌 친근감 있는 목자로 모두에게 다가갔다.
(편집자주: 가톨릭 내 대표적 조직인 예수회와 오푸스데이는 역사와 성격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1540년 창립된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세운 수도회로, 교육·학문·선교에 중점을 둔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예수회 출신이다.
반면 1928년 설립된 오푸스데이는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가 창립한 평신도 중심 단체다. 일반 신자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신앙을 실천하도록 이끄는 조직으로, 규율과 보수적 영성이 특징이다. 예수회는 지성 중심이며 사회 참여적이고 비교적 진보 성향을 보이는 반면, 오푸스데이는 세속 안에서의 성화를 강조하며 전통적 가톨릭 가르침을 엄격히 따른다. 두 조직 모두 교황청과 긴밀히 연결돼 있지만,활동 방식과 영성은 현저히 다르다.)

누구에게도 권위 내세운 적 없어
교황은 교과서가 아닌 삶에서 현실을 직면한 인물이었다. 이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이 시대의 표징을 읽고 신앙을 기준으로 식별하려 노력했다. 그는 사회적, 문화적 질병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 고통을 치유하려 애썼다. 특히 약자를 배제하는 경제 시스템, 소비 경제에 치중한 비문명적인 문화, 노인과 병자의 고통, 시장경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그리고 소비와 쾌락, 안락만을 추구하는 문화에 반대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추기경 시절 그가 ‘예수회 신부’라는 잡지와 한 인터뷰에는 그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새로운 현실 속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직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선교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꾸준한 미션, 선교여야 합니다. 사목적 개혁은 신앙을 심사하는 교회에서 신앙을 전달하고 지킬 수 있는 교회로 변화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회 신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인터뷰)
2013년 3월 내가 잠시 한국에 들어와 대전교구와 서울대교구에서 있을 때였다. 그해 3월 13일 가톨릭교회는 베드로의 265번째 후계자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선택했다. 일개 사제의 생각이었지만 내가 본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교회가 필요로 한 산소 같은 인물이었다. 대중과의 소통에 놀라운 친근함을 보였고, 신자들에게는 격식 없는 관계를 유지했던 새 교황을 하느님께서 사용하셨다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동안 알려진 신학자도, 문학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신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더 중요시 여긴 리더였다. 신학을 공부하고 교수직을 맡은 적은 있지만,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긴 인물이었다.
2014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서 들은 얘기지만 항상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니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에게 신부들이 돈을 모아 콘클라베(Conclave·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회의)를 위해 새 구두를 사드렸다고 한다. 추기경은 비즈니즈석을 사려 했던 비서신부에게 일반석을 사라고 지시했다.
자가용을 타지 않고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추기경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신자들을 만나고 아버지 모습으로 사제들을 만나는 추기경은 외식도 꺼릴 정도로 검소했다.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사용한 것에서도 그의 종교관이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란 교황명은 ‘가난한 자의 성자’로 불리는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프란치스코(1182~1226)의 이름을 딴 것이다. 바티칸 측은 바오로, 베네딕토 등 전임 교황들이 많이 사용하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소외된 이웃을 잊지 않기 위해 프란치스코란 교황명을 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철학자이자 시인이었고, 깊이 있는 가르침을 감동적으로 전하는 인간적인 스승이었던 반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자로, 어려운 주제도 차분하고 간결하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에 비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빈과 소통의 스승이었다. 그는 소박함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의 가르침은 대립과 폭력이 아닌 호소와 희망,기도와 자비의 힘을 일깨워 주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대화와 열린 마음으로 모든 이를 존중하며 진실을 강하게 호소한 교황이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교황이 된 후, 성직자들에게 “양의 향기가 나는 목자가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판자촌에서 만나 사역을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페페 신부가 피곤해 보여서 휴가를 보냈다”며 직접 판자촌으로 와서 목자를 자처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넷플릭스 영화 ‘두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태어난 나라의 축구를 함께 보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네 축구팀 산로렌소를 응원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친구들과 고기를 구워 먹거나 옆집 할머니들과 수다를 떨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분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주교좌성당의 작은 고해소에 몰래 들어가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기도 했다.
‘자비가 열쇠’임을 강조
그의 선종 소식은 특히 이곳 아르헨티나에서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정부가 7일간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여 선거운동 중인 정치활동 등이 취소됐으며. 교구별로 추모 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오늘(현지시간 4월 22일) 아침에만 해도 부에노스 대성당에 수천 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한국과 같은 장례문화가 없어서 아마도 따로 대규모의 추모행사는 없을 듯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각자의 공동체에서 추모의 표현을 하고 있다. 모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아이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는 친구 같았고, 할아버지 같았고, 스승이었으며, 진정한 아버지였다. 12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라는 인물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것을 감사히 여긴다. 그의 청빈한 삶, 깊은 신심, 그리고 남미 교회의 순박함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토는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였다. 이는 베다 성인이 마테오 사도의 부르심을 설명할 때 썼던 표현으로, 사도를 선택하기 전에 먼저 사랑과 자비의 감정으로 바라보셨다는 의미이다. 슬픈 장례 미사도 드리지 못한 채 부활절 다음날 세상을 떠난 교황은,여전히 자비가 열쇠임을 우리에게 남긴 채 이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