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강생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 아드님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즉 수많은 필요에 예속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우리 인간조건을 취하시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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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강생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 아드님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즉 수많은 필요에 예속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우리 인간조건을 취하시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께서 성령의 힘으로 사람으로 잉태하신 그분은 다름 아닌 성부의 영원한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정체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며, 이것이 그리스도론 전체 교리의 토대가 됩니다. 그리스도론이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세상에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성찰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성찰은 신약성경의 문헌들, 곧 복음서와 성 바오로와 성 요한의 서간들, 그리고 그 밖의 문헌에서 출발점을 찾습니다.이 문헌들은 예수님이 누구 신지와 그분이 인간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동시에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매우 중요한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곧 예수님은 단순히 한 인간일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실제로 부활 이후 몇 년 사이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공경하고 찬미하며 그분께 찬미가를 불러 드렸고, 주일마다 모여 그분을 기념하는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고려한다면 이 모든 것은 매우 논리적이었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하느님의 유일한 대표자로 여기셨고, (겸손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죄를 용서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을 개혁하시며 당신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등 신적 특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게다가 라자로의 부활과 같은 중요한 기적들로 이 모든 것을 확증하셨는데,이는 우주적 요소들과 사람들과 마귀들에 대한 당신의 지배와 권능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부활하셨고, 성부의 옥좌로부터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시대를 위하여 하신 약속들을 이루셨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곧 영원히 지속될 나라를 세우신다는 약속으로, 그 나라에서 예수님 당신이 하늘에 좌정하신 메시아-임금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거룩하게 상상하려 하여도 단순히 한 인간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근본적인 물음에 부딪혔습니다. 곧 예수님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 이신가 하는 물음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물음은 대답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오직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이 마치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신 것처럼 행동하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매우 분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두 분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이 마지막 물음은 부조리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른 모든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오직 한 분 하느님이 계시며 —계실 수 있으며—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하느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성찰은 조금씩 만족스러운 해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미 성 바오로의 서간에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두 하느님을 주장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실 뿐입니다. 그분에게서 만물이 나왔고 우리도 그분을 향하여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뿐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생겨났고 우리도 그분을 통하여 있습니다”(1코린 8,6). 그는 “한 분 하느님과 한 분 주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실제로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같은 차원에 두고 있습니다.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지니신 신성 자체를 나타내는 가장 흔한 이름”(“가톨릭교회 교리서”, 446항)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주님'이라는 신적 칭호를 드림으로써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말합니다— 교회의 초기 신앙 고백은 처음부터 하느님 아버지께 드려야 할 권능과 영예와 영광이 예수님께도 해당한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신적 조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49항).

이 모든 것은 성 요한 복음서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복음서는 처음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자체로 하느님이셨던 하느님의 말씀을 분명히 구별합니다(참조: 요한 1,1). 성 요한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육화한 말씀이시라고 말합니다.그 말씀은 시간과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므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언제나 성부의 말씀이었고, 그런 까닭에 성부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성부와 구별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이라고 말하면서도 두 분 하느님이 있다고 말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 문제에 성 요한이 답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성 요한이 생각하기에 그 말씀은 성부처럼 신적이지만, 완전히 성부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제2의 하느님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을 위격들의 삼위일체로 고찰하는 길이 열립니다. 곧 성부, 성자,성령이십니다. 이렇게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의 내밀함을 열어 사랑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 사랑은 세 위격의 완전한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론 공의회들에 비추어 본 예수님의 정체

사도 시대 이후의 여러 세기 동안, 교회는 신약성경이 확언한 것을 토대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 정확히 정의하고 심화시켰습니다. 복음화의 확장으로 복음은 비 유다인 세계, 특히 여러 등급의 다신을 인정하던 그리스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성부보다 열등하고 변할 수 있으며 육화할 수 있는(변할 수 없는 성부와는 달리) 일종의 제2의 하느님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리우스의 주장이었으며, 이에 맞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반응하였습니다(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465항).이 공의회에서 우리가 주일마다 신경으로 암송하는 내용, 곧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시라는 내용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하나의 신성을 나누어 지니시며 동일한 존엄성을 지니신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한 세기 뒤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면, 동시에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경험상 인간은 한 개체이며, 하느님 또한 구별되고 개별적인 존재이십니다. 어떻게 하나의 실재일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깊이 결합되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서로 구별되는 두 존재가 아닌가? 이러한 방향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나아갔습니다. 그에게 하느님과 인간 예수는 언제나 완전한 결합 안에서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의 단일체를 이룹니다. 마치 질주하는 말과 그것을 모는 기수가 결합하여 행동하며 서로 맞추어 가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 두 개의 구별된 존재인 것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팔레스티나에서 사시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등은 말할 수 있지만,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영원한 말씀은 변하지 않으므로 인간처럼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인간 예수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결책의 문제점은, 복음서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가 하나의 존재, 하나의 살아 있는 실재라는 것을 실제로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이 공의회는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즉 인간 본성을 당신 자신 안에 통합하듯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지지하였습니다(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446항). 그런 까닭에 그것은 네스토리우스가 주장하듯 다소간 결합된 두 개의 구별된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인간 본성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곧 사람이 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교리는 “위격적 결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인간적인 것이 말씀의 선재하는 위격, 곧 말씀의 히포스타시스 안으로 통합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정식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교리를 오해하여, 그리스도 안의 인간적 요소가 신적 위격 안에 흡수됨으로써 그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인간성은 그 존립성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를 막기 위하여 20년 뒤, 칼케돈 시에서 열린 또 다른 보편 공의회가 에페소 공의회의 사상을 다소 다른 방식으로 재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위격이시지만 이중의 방식으로 존재하신다고 공의회는 말하였습니다.곧 영원히 하느님으로서, 그리고 시간 안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하십니다.그분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이십니다.이때부터 이후의 공의회들은 칼케돈의 교리를 더욱 정확히 하고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 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참으로 인간이시기 때문에 참된 인간 의지를 지니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분은 우리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강생

역사적 문제들을 넘어서, 강생 교리의 핵심은 역사 안에 계시는 하느님 아드님의 인격적 현존에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인간적 몸짓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게 되고, 어떤 방식이든 하느님 자신이 어떤 분 이신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강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강생은 삼위이신 하느님의 사업입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곧 아드님께서 시간 안에 들어 오시어,성령께서 마리아의 동정 태중에 마리아의 협력과 동의로 불러일으키신 인간의 실체, 곧 인간성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영원히 존재하시던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으로도 존재하기 시작하십니다.

역사 안에 계시는 하느님 아드님의 현존은 또한 성부와 성령의 가까이 계심 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다른 신적 위격들도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 요한은 이러한 측면들을 강조하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오심은 신적 존재의 내밀하고 접근할 수 없는 특징들을 드러내어, “일찍이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분(요한 1,18)이 육화하신 외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명백히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짓과 정감과 말씀을 통하여, 성부와 사람들과의 관계,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호의, 그리고 이 땅의 실재가 지닌 가치와 의미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외 아드님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성령을 지니신 분, 역사 안에서 성령의 성전이며 거처이시며,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이 라고도 불리십니다. 물론 옛 이스라엘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특별한 소명이나 사명을 이유로, 그리고 그들 안에 신적 성령이 현존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기름부음은 훨씬 더 근본적입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으로서 그분 고유한 구성, 곧 강생의 신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성령으로 온전히 기름부음을 받아 세상에 오시며, 그런 까닭에 그분 안의 모든 것이 신적 현존을 환기시키고 하늘의 실재가 지닌 순수함과 영성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러한 근본적인 현존은 또한 예수님을 은총과 초자연적 은사로 가득 채워, 그분께서는 정의와 선함으로 가득한 당신의 행동들 안에서 그것을 펼치시고, 위엄이 있고 온유하지만 언제나 지혜와 생명으로 가득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불어넣어 주십니다.예수님 안의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그분의 인간적인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이 사랑은 그분이 마주치시는 실재 위에, 무엇보다 죄가 해친 모든 것 위에 부어져,그것을 회복시키고 성부께 다시 이끌어 드립니다.

예수님의 인간적 지식과 의지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하느님이신 그분은 만물에 대한 영원하고 초시간적 지식을 지니고 계시지만, 사람이 되신 이후로 실재에 대한 그분의 앎이 인간 고유의 인식 방식을 따릅니다.곧 예수님도 우리처럼 당신의 인간적 정신 안에서 형성되는 경험과 이미지와 개념 등을 통하여 외부 실재를 인식하십니다.육화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의 법칙을 건너뛰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며, 그런 까닭에 그분 또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말하기를 배우시고, 읽기를 배우시며, 일하기를 배우시고, 실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조금씩 알아 가셨으며, 또한 마리아와 요셉이 무엇보다도 가르쳐 준 이스라엘의 신심에 관한 많은 것들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정신은, 다른 모든 인간 지성과 마찬가지로 유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경험이나 통상적인 인간의 학문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식, 곧 초자연적 지식을 지니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복음서들은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성 베드로의 배반과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아셨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경우들과 비슷한 다른 경우에서 이는 신적 영감의 열매로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정신에 나타난 직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삶 동안 지니셨던 가장 중요하고 깊은 지식은 당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 또한 깊이 초자연적이었고, 그분의 위격이 영원히 성부와 결합되어 있으며 —그분은 성부의 외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의 인간성이 당신 위격 안에 취해져(통합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분 삶과 내밀함의 항구적인 차원을 이루었습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신의 인간적 의식 안에서 성부와의 완전한 일치를 체험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온전한 의식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요약편”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지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이성적인 인간 영혼을 지닌 몸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지성으로 체험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셨습니다.그러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내밀하고 직접적인 지식을 지니고 계셨습니다.또한 사람들의 은밀한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당신이 계시하러 오신 영원한 계획들을 온전히 알고 계셨습니다”(90항).

예수님은 또한 참된 인간적 의지를 지니셨고 온전히 자유로운 인간이셨습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원죄에서 비롯되어 우리를 세 가지 사욕, 곧 세속과 눈과 육신의 사욕에 쉽게 굴복하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저 내적 무질서에 예속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자유로우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처음부터 마리아의 태중에서 그분의 인간성을 빚으셨고, 그 뒤로도 언제나 그분의 삶 안에 온전히 현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예수님이 자유로우셨던 것은, 그분의 행동이 언제나 성부에 대한 사랑과 성부께서 맡기신 사명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성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고,그분 마음 안의 성령의 사랑은 그분의 행위를 정의와 애덕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였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의 모범이십니다(참조: “기쁨과 희망”, 22항).

그리스도의 이 위대한 자유는 여러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분은 어떠한 사람이나 상황, 또는 어떤 형태의 두려움에도 좌우되지 않으셨고,의인들이 죄인들을 멸시하고 그들과 섞이지 않으려 애쓰던 당대 사회의 문화적 장벽에도 굴하지 않으셨습니다.오히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사회적으로 좋게 여기지 않던 그러한 환경에서 마태오 같은 몇몇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당대에 매우 널리 퍼져 있던 무익한 율법주의를 깨뜨리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으셨고, 성전의 거룩한 존엄을 저버리던 상인들의 탁자를 분노 안에서 뒤엎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가족에게도, 권력의 구조에도 좌우되지 않으셨고,바리사이들과 맞서고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당신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내어 주시는 것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 성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자유를 지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인간적 의지로써, 성부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영원히 결정하신 바를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행위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사람들을 위하여 역사의 영역으로 가져왔습니다.

강생 신비의 가치

우리가 신경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육신을 취하시고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라고 암송할 때, 우리는 말씀이 취하신 인성이 참되고 실제적이며 한 여인의 살에서 난 열매라는 것을, 그런 까닭에 그분이 우리 가운데 한 분이시며 우리 종족에 속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인간적인 마음도 영혼도 지니지 않으셨을 것이고, 고통받거나 죽으실 수도 없었을 것이며, 부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강생의 신비는 예수님 생애의 다른 모든 신비의 토대이자 전제입니다.

말씀은 수많은 필요에 예속된 우리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조건을 취하시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집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양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주님께서는 이 구원사업을 당신의 모든 행위로 이루셨는데, 특별한 공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던 이른바 “숨은 생활” 시기, 곧 젊은 시절의 몇 해 동안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우리의 구속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것들을 성부께 합당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사심으로써, 우리도 그것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해 주시고, 이렇게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심으로써 그것을 치유하시고 정화하셨다고 즐겨 말하였습니다.우리는 이 생각을 이어받아, 주님께서는 일상생활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심으로써 그것을 정화하셨고,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것으로 변화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가 말하였듯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라나시고 사시면서,예수님은 인간의 실존, 곧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도 신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그리스도, 지나가시는 주님”, 14항). 하늘에 계신 당신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발견할 수 있도록 당신의 은총을 주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일들이 우리에게 성화의 길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삶으로 우리를 성부께 이끄는 우리의 길이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업적은 그 구속적 가치 외에도 계시적 가치를 지니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 때문이며, 또한 총괄적 가치도 지니는데, 이는 그것들이 인류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고 세상에 하느님의 주권, 곧 그분의 나라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동정 마리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말씀의 강생과 함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도록 예정되었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하여 마리아는 '그렇게도 중요한 임무에 알맞은 은사들을 하느님에게서 받으셨다'(LG 56)”(“가톨릭교회 교리서”, 490항). 성 가브리엘 대천사는 수태고지 때에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라고 부르며 인사하였습니다. 말씀이 육화되기 전부터, 마리아는 신적 은사들에 대한 당신의 응답으로 이미 은총이 가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당신의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시키시고자 이러한 특별한 은총의 은사들을 그분께 베푸셨습니다. 이 은사들에 이끌리어 마리아는 당신의 소명을 알리는 소식에 자유로이 동의하실 수 있었고(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490항), 어떠한 개인적 죄에서도 순결하게 머무르실 수 있었으며(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493항), 아드님의 구속 사업에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실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 자신도 잉태되신 그 순간부터 구속되었습니다. “이것이 1854년 교황 비오 9세께서 선포하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의가 고백하는 바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미리 내다보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은과 특권으로,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의 모든 흠에서 아무 손상 없이 보호되셨다'(DS 2803)”(“가톨릭교회 교리서”, 491항).

성모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께서 성령의 힘으로 사람으로 잉태하신 그분은 […] 다름 아닌 성부의 영원한 아드님,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기”(“가톨릭교회 교리서”, 495항)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동정이셨습니다. 오래전부터 교회는 신경에서 마리아를 “[…] '한결같이 동정이신 분'(참조: LG 52)”으로 고백하고 전례 안에서 공경해 왔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99항; 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496-507항). 교회의 이러한 신앙은 “해산 전에도, 해산 중에도, 해산 후에도 동정이신 분”이라는 오래된 정식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교회는 예수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오직 성령의 힘으로, 곧 남자의 개입 없이 성령의 활동으로 잉태되었다고 고백해 왔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96항). 마리아는 또한 해산 중에도 동정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면서 그분의 동정을 성별하셨기 때문입니다(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499항). 그리고 그분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뒤에도 여전히 동정으로 머무르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 “원죄의 모든 흠에서 벗어나 보존되신 원죄 없으신 동정녀께서는 이 세상에서 삶의 여정을 마치신 다음, 만물의 주님이신 당신 아드님을 더욱 온전히 닮으시고자,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온 우주의 모후로서 옥좌에 높여지셨습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예표를 이룹니다(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966항).

마리아는 구속자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그분의 신적 모성은 또한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협력을 포함합니다. “마리아는 […] 관대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고 어떠한 죄에도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으신 채, 당신 아드님의 위격과 사업에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시어,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당신 아드님 아래에서, 또 당신 아드님과 함께 주님의 종으로서 구속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56항). 이 협력은 무엇보다 그분의 영적 모성 안에서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은총의 질서 안에서 참으로 우리의 어머니이시며,신자들이 은총의 생명으로 태어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협력하십니다. 또한 하늘로부터 그분은 어머니로서 우리를 돌보시며,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하느님의 은총들을 여러 가지로 전구해 주십니다(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969항).

마리아는 교회의 모형이며 모범이십니다. “동정 마리아는 교회에게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마리아는 교회의 '가장 탁월하고 완전히 특별한 지체'(LG 53)이며, 나아가 교회의 '모형'(LG 63)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67항).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1964년 11월 21일, 그리스도인 백성에게 마리아께서 행사하시는 모성적 역할을 명시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엄숙하게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비추어,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에 대한 교회의 신심이 그리스도교 경배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는 “교회로부터 특별한 공경을 마땅히 받으시는”(“가톨릭교회 교리서”, 971항) 분이시며,이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그분께 봉헌하는 수많은 축일과 전례 기념일, 신심 행위들 안에서 드러납니다.

안토니오 두카이

기본 문헌:

  • “가톨릭교회 교리서”, 430-534, 720-726, 963-975항.
  • 요한 바오로 2세, “나는 그리스도를 믿나이다.신경에 관한 교리 교육 (II)”, Palabra, 마드리드 1996년.
  • 안토니오 두카이, “예수, 구원자이신 아드님”, Rialp, 마드리드 2015년 (특히 2-4장).
  • 비센테 페레르 바리엔토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Rialp,마드리드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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