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에 관한" 사목 서한

페르난도 오카리스 몬시뇰, 오푸스데이 단장, 2026년 10월 16일

"관상에 관한" 사목 서한

관상에 관한

사목 서한

페르난도 오카리스 몬시뇰

오푸스데이 단장

로마, 2026년 10월 16일

16 octubre 2026

서한 날짜: 2026년 10월 16일

목차

관상에 관한 서한 (1–2항)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는 예수님 (3항)

성 호세마리아의 삶에 드러난 관상 (4–5항)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6–8항)

“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렵니다!” (9항)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기 (10항)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기 (11–12항)

시간은 짧습니다 (13항)

관상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14–16항)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17–18항)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기 (19항)

사랑받는 자녀로서 (20–21항)

영혼들을 향한 갈망으로 (22–24항)

지극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저의 딸들과 아들들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 지난 3월 메시지에서 저는 오푸스데이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며 올해 10월부터 내년 10월까지 “우리 아버지께서 오푸스데이 정신의 여러 요소를 함축하여 표현하신, 세상 한가운데에서 관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더욱 깊이 새겨 보자고 제안했습니다[1].

우리에게 고유한 성소는 일상의 평범한 상황 속에서 관상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게 합니다. 오푸스데이는 몇 가지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런 의무를 다하는 것은 큰일이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훨씬 더 먼 곳을 향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하며, 그분의 시선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이는 원대한 초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이 초대에 응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소를 온전히 살아가려는 큰 열망으로 오푸스데이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관상으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나의 결점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 한가운데에서 관상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걸음마다, 사건마다, 순간마다 당신을 만나도록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2. 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교회의 신학 전통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전적인 정의를 제시합니다. 관상은 simplex intuitus veritatis ex caritate procedens, 곧 사랑에서 우러나와 진리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2]. 이는 순전히 지적인 노력이나 추상적인 사변이 아닙니다. 관상은 애정 어린 시선이며, 사랑에서 비롯되는 바라봄입니다.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강령, 곧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 강령이자 예수님의 행동 강령은 ‘보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어디에 사랑이 필요한지 알아보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3].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면, 지성과 감성은 하나의 단순한 바라봄 안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 시선은 관상하는 사람을 차츰 변화시킵니다.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는 예수님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 그 이상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삶 안에서 당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매우 다양한 상황과 장소에서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분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시는 모습을 봅니다(루카 3,21 참조). 아버지와 고요히 함께 계시려고 외딴곳을 찾으시는 모습(마르 1,35; 루카 5,16; 9,18 참조), 따로 산으로 가시는 모습도 봅니다(마태 14,23; 마르 6,46; 루카 6,12; 9,28-29 참조). 수난 중에도 올리브 동산에서 고뇌하실 때부터(마태 26,36-44 참조)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루카 23,34.46 참조) 아버지와 대화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기도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기록들을 넘어서[4], 우리는 그분의 온 생애가 실로 끊임없는 대화였음을 압니다. 행동과 눈길, 일과 휴식으로도 이어지는 대화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삶과 관계와 몸짓을 적셔 주는 숨은 수로처럼 그분의 온 생애를 관통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계획에 따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도록 갈수록 더욱 굳건하게 그분을 이끌어 갑니다”[5].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특히 그리스도의 30년에 걸친 숨은 생활에 담긴 관상에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의 그 삶은 관상적이면서도, 특별할 것 하나 없이 지극히 평범합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처럼 자라고 살아가시면서, 인간의 삶과 평범한 일상 활동에 하느님께 속한 의미가 있음을 계시해 주십니다. (…)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세월이지만, 우리에게는 햇빛처럼 밝은 세월입니다. 아니, 우리의 날들을 비추고 그날들에 참된 지평을 열어 주는 빛입니다”[6].

성 호세마리아의 삶에 드러난 관상

4. “길 위의 관상가.” 성 호세마리아의 영웅적 덕행에 관한 교령은 그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문헌은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그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활동가로서 지녔던 탁월한 재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생활과, 그분을 길 위의 관상가로 만들어 준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 체험에도 있습니다”[7]. 오푸스데이 안에서 그분의 딸들과 아들들인 우리, 그리고 오푸스데이를 가까이하는 모든 이가 바로 이러한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곧 길 위의 관상가가 되어, 도시의 거리와 분주한 일상 한가운데에서 하느님과 대화하며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가정과 일터와 생활 터전, 어디에 있든 늘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저의 분심이 거꾸로 된 분심이 되게 해 주십시오. 당신과 대화할 때 세상일을 떠올리는 대신, 세상일을 할 때 당신을 떠올리게 해 주십시오”[8]. 우리의 설립자께서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이면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려 하셨고, 겉으로는 가장 ‘세속적’으로 보이는 것들 한가운데에서도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려 하셨습니다. 하찮거나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행동들 안에서 시를, 곧 “열한 음절로 된 시구”[9]를 발견하고자 하셨습니다.

5.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세상의 분주함 한가운데에서 하신 깊은 기도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 부르심을 확인해 주신다고 보셨습니다. 신문을 읽거나 전차를 타거나 대도시의 분주한 움직임을 경험할 때 일어난 체험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삶에서도 흔히 마주하는 여러 상황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한 번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특별한 일이기에 적어 두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신문을 읽을 때 곧잘 기도의 은총을 주십니다”[10]. 며칠 뒤에도 비슷한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레티로 공원에 가서 (…) 신문을 읽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어찌나 힘차게 솟아오르는지, 제 뜻과는 달리 읽기를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랑과 의탁의 행위를 제 마음과 입술에 담아 주셨는지요!”[11] 그분께서는 일상의 오가는 길에서 바친 기도에 대해서도 기록하셨습니다. “가장 드높은 기도를 체험한 것은 (…) 전차를 타고 가다가, 이어서 마드리드 거리를 이리저리 걸으며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라는 놀라운 사실을 관상할 때였습니다”[12]. 제가 이 서한을 여러분에게 보내는 바로 이날은 그 체험으로부터 꼭 95년이 되는 날입니다[13].

20세기 후반에 접어든 뒤, 세계의 주요 다문화 도시 가운데 하나인 런던을 처음 방문하셨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니 당혹스러웠고, 제게는 능력도 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세마리아, 너는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옳은 생각이었습니다. 저 혼자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땅에서 지푸라기 하나도 들어 올릴 수 없을 것입니다. (…) 그런데 갑자기,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제 안에, 제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의 팔이 지닌 능력이 느껴졌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4].

이것이 성령께서 성 호세마리아를 통하여 우리를 초대하시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과 힘으로 인생길을 걸으며,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나누는 것입니다. 또는 스승님의 사랑받던 제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남긴 그분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15].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6. 현대 세계에 관한 분석들은 우리 사회에서 활동 자체에 치중하며 삶을 오로지 일에 쏟아붓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많은 사람의 노력은 거의 전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데 집중되어 있는 듯합니다. 물질적 재화와 경험과 사회적 명성 등을 쌓아 더 나은 삶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거의 모든 영역에 늘 존재하는 기술의 영향까지 더해집니다. 기술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사람을 고립시키고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가로막으며, 하느님과 이웃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마음을 여는 일마저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내적 생활과 이웃 사랑에 꼭 필요한, 마음을 가다듬고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이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의 주의력을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는 수많은 관심거리 때문에 주의력이 조각나고 있습니다. 레오 14세께서 최근 지적하신 대로, “새로운 기술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선택이 시험받는 인공적인 환경이 되었습니다”[16].

7.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사람들에게 숨 돌릴 여유를 주고, 쉼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삶에 부여할 길을 찾고 있습니다. 몇몇 나라에서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나타난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제안이 늘어나고 있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부분적인 데 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초자연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삶의 충만함에는 대체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제안들은 물질이 주는 불안정한 안도감이나 세속적인 의미의 행복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종교적 감각이 깨어나고, 인간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중요한 분이신지 새롭게 발견하며, 영성을 추구하고, 인간의 삶을 오직 수평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서려는 요구를 보여 주는 많은 징표를 봅니다”[17]. 우리 모두는 주변에서 관상을 발견하고, 하느님과 함께하며, 그분의 평화를 누리기를 갈망하는 이러한 영적 목마름을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8.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도하는 영혼”이 되라고, 세상 한가운데에서 관상하는 영혼이 되라고 권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어느 시대에나, 오늘날의 세속화와 점점 더 발전하는 기술 한가운데에서도 유효합니다. “제게 숨이 붙어 있는 한, 저는 기도하는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필요를 끊임없이 설교할 것입니다. 언제나! 어떤 때든, 아무리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든 그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주님을 찾으면 우리의 온 하루는 친밀하고 신뢰에 찬 하나의 대화가 됩니다. 저는 이를 수없이 말하고 글로 써 왔지만, 거듭 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모범으로 이것이 올바른 길임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밤부터 아침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18]. 사실 우리는 이 시각을 전하기에 매우 좋은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성 호세마리아 기념일 미사 강론에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무한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갈망을 채우려는 모든 방법이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직 물질적 재화나 성공이나 안락함에 기대어 행복을 얻으려다가 시간을 허비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시고 우리 마음의 갈망을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압니다”[19]. 영성을 향한 이러한 목마름 앞에서, 교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이의 마음 깊은 곳에 살아 있는 하느님을 향한 이러한 갈망 앞에서, 세상 한가운데에서 관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초대를 전하는 일은 특별히 더 필요합니다.

“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렵니다!”

9. 사랑의 가장 깊은 움직임은 사랑하는 이를 찾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피상적으로 아는 것, 사랑하는 이에 관해 몇 가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그 앞에 머물며, 그 목소리를 듣기를 갈망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도에는 시편 저자가 자녀의 마음으로 드린 이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Vultum tuum, Domine, requiram(시편 27[26],8), “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일상생활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열정적으로 찾는 삶을 몸소 사셨고, 이를 가르치셨습니다. 한 강론에서 그분께서는 당신이 살아 내신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끊임없이 찾지 않을 수 없게 되는지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화살기도 하나를, 이어서 또 하나를, 다시 또 하나를 바칩니다. … 그러다 그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말이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하느님과의 친밀함에 자리를 내어 드리게 되고, 쉬지 않고 지치지도 않으며 하느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로잡힌 이들처럼, 포로들처럼 살아갑니다. 우리의 실수와 한계 안에서도, 각자의 처지와 직업에 따르는 일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수행하는 동안, 영혼은 빠져나가기를 갈망합니다. 자석의 힘에 끌리는 쇠처럼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감미로운 설렘 속에서, 예수님을 더욱 힘있게 사랑하기 시작합니다”[20].

일상생활에서 주님의 얼굴을 찾는 영혼은 바로 그곳이 주님을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임을 발견합니다. 관상은 소수의 특별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도 아니고, 세상을 떠나 은거하는 사람들만의 목표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은 일상의 활동 한가운데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띱니다. 우리는 일하는 책상 앞에서, 가족을 돌보는 가운데, 사람들과 어울릴 때, 그리고 휴식 중에 주님을 만납니다. 사랑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눈길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우리의 눈길로 그분께 응답하도록 초대합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기

10. 사랑이 담긴 이 시선은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을 깊이 변화시킵니다. 전에는 문제만 보이던 곳에서 감사와 찬미의 이유를 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우리 운명에 내맡겨져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보살피고 계심을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마음속 독백만 이어 가던 곳에서 그분과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거리의 소음과 사람들의 수고 한가운데에서, 곧 공장이나 대학, 들판이나 사무실, 가정에서 우리는 자녀다운 단순한 관상 안에,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 곧 사람과 사물과 일이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할 기회와 주제를 주기 때문입니다”[21].

믿음은 지금 여기에서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줍니다. 우리는 매 순간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기에, 모든 순간과 상황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합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안에서 그분 섭리의 세심한 보살핌을 알아봅니다. 기쁨과 어려움, 성공과 시련이 주님과 나누는 대화의 ‘재료’이자 자리가 됩니다. 사랑으로, 봉사하고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려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 어떤 일도 하느님과 무관하지 않으며, 초자연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기

11. 영적 생활을 일상의 의무에서 감상적으로 도피하는 일이나 추상적인 이상 속으로 피신하는 일로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교 관상은 강생의 신비에 깊이 뿌리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쓸모없는 몽상에 빠져 구름만 바라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일들, 지금 손에 맡겨진 일들을 통하여 하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예기치 못한 일들과 좌절을 통해서도 그러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에 전념하는 꼭 필요한 시간뿐 아니라, 정성껏 완수한 일과 가족을 돌보는 일, 시민으로서의 책임 있는 참여와 우정도 우리에게는 관상의 자리입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이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라는 강론에서 이를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을 만날 줄 알지 못한다면, 결코 그분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물질과 가장 평범해 보이는 상황들에 본래의 고귀한 의미를 되돌려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을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도록 하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만나는 수단과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22].

결국 관상은 우리가 지상의 책임을 외면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책임들을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하기에, 애쓰고 정성을 다하여 수행하도록 이끕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매 순간을 영원의 울림으로 살아가라”[23]고 말씀하셨습니다.

12. 하느님 현존의 감미로움을 맛본 영혼은 거룩한 긴장을 느낍니다. 한편으로는 하늘에서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사유를 통해 드리는 기도가 더욱 고요하고 깊은 관상으로 변화하는 이 내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셨습니다. “말은 너무나 빈약해집니다. … 하느님과의 친밀함에 자리를 내어 드리며, 쉬지 않고 지치지도 않으며 하느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 이제는 이치를 따지지 않고, 바라봅니다! 영혼은 다시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매 순간 자신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계심을 느끼고 알기 때문입니다”[24].

이 관상은 우리를 현재의 시간에서 떼어 놓기는커녕,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이끌려 우리는 “하늘과 땅에 동시에 머무르는” 기쁜 역설을 체험합니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문제와 수고와 희망을 함께 짊어지며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있으면서도, 마음과 정신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인 그 사랑의 흐름”[25]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세상과 하늘에 함께 속하는 이러한 삶을 특별히 명료하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대의 애정이 계단이며, 그대의 의지가 길입니다. 사랑하면 올라가고, 마음을 소홀히 하면 내려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땅에 있어도 하늘에 있게 됩니다. 마음을 들어 올리는 것은 몸을 들어 올리는 것과 다릅니다. 몸을 들어 올리려면 몸의 위치를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을 들어 올리려면 그대의 뜻을 바꾸십시오”[26].

시간은 짧습니다

13. 오푸스데이 성소의 세속적 특성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는지 잊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하늘에 있음을 알면서 역사의 길을 걸어갑니다(필리 3,20 참조). 시간이 흘러간다는 이러한 자각은 우리의 삶에 지금 사랑해야 한다는 깊은 절박함을 새겨 줍니다. 성 바오로께서는 Tempus breve est(1코린 7,29), “시간은 짧습니다”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이는 불안에 사로잡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주시는 모든 기회를 평온한 마음으로 선용하라는 격려입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우리가 너그럽고 기쁘게 자신을 내어 주도록 북돋우시려고 이 사실을 자주 묵상하셨습니다. “Tempus breve est!(1코린 7,29) 우리가 이 땅을 거쳐 가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요! (…) 참으로 사랑하고, 내어 주고, 보속할 시간은 짧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을 낭비하거나, 그 보물을 무책임하게 창밖으로 내던져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이 지상의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27].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탈렌트이며, 우리는 그 시간을 성화해야 합니다. 일하는 매 시간, 애정을 표현하는 모든 행동,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세심한 배려 하나하나가 영원에 쌓이는 동전입니다. 영광 안에서 이루어질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하면, 매일의 크고 작은 일들에 담는 사랑만이 영원히 남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관상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14. 또한 관상은 인간의 기법이나 심리적인 집중 방법만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상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성령께서 겸손하고 온순한 마음에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성녀 데레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28].

그러므로 관상에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분께서 사물을 보시는 대로 우리도 볼 수 있도록, 필요한 빛을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저의 그리스도님, 제 영혼의 예수님.” 당신 진리의 밝음과 당신 마음의 다정함으로 세상과 사람들과 사건들을 바라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또는 그분께서 다른 때 주님께 간청하신 말씀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보게 해 주십시오! 제 지성이 빛으로 가득 차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 정신 깊이 스며들게 해 주십시오. 그분의 생명이 제 영혼에 뿌리내려, 영원한 영광을 향해 저를 변화시키게 해 주십시오”[29].

15. 관상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를 수 없는 선물이지만, 우리 편에서도 적극적인 응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은총이 본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전제하고 완성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관상 생활로 나아가는 길에는 평온하면서도 꾸준한 영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첫째, 매일의 묵상 기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롯이 하느님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는 법을 배웁니다. 묵상 기도 안에서 영혼은 새로워지고, 남은 하루 동안 하느님과 끊임없이, 흔히 말없이도 대화를 이어 가는 데 필요한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를 상기시킵니다. “특별히 전념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없다면 ‘언제나’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시간은 그 깊이와 길이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특별히 지탱해 주는 시간입니다”[30].

둘째, 하루 내내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선물을 주님께 청하는 것과 더불어, 하루 동안 그런 기도를 준비하고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적인 수단들도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침묵의 시간을 찾는 것, 한 가지 활동에 꾸준히 머무르는 굳셈, 항구하게 일하는 끈기, 경청하는 겸손, 자연과의 만남, 진실한 우정에 마음을 여는 것 등 여러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에서 생각해 보도록 초대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언제나 베푸시는 은총을 받아들여 열매 맺도록 우리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마태 13,1-23 참조). 레오 14세께서는 최근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주의력을 건강하게 가꾸는 참된 습관을 장려해야 합니다. 곧 침묵, 성찰을 곁들인 공부, 독서, 신중한 분석이 자리 잡은 생활 리듬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없다면 내적 자유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31]. 내적 자유와 함께 기도하는 우리의 능력도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16.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아무런 노력 없이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기다리는 착각을 경계하셨습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 사람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지혜나 성덕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32]. 지혜와 성덕을 가져다주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겸손하고 꾸준하게 응답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작은 일에서 지치지 않고 싸워 나가야 합니다. 성덕은 결점이 전혀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심을 알면서 언제나 겸손하게 다시 시작하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이어지는 이 싸움은 경직된 긴장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찾아 만나시도록 내어 맡기려는 자녀의, 사랑과 신뢰에 찬 노력입니다. 그 자녀는 선의를 지녔는데도 넘어지거나 잘못할 때조차 아버지께서 자신을 기꺼워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17. 복음의 참행복은 관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을 가리켜 줍니다. Beati mundo corde, quoniam ipsi Deum videbunt(마태 5,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의 깨끗함은 정결의 덕을 반드시 포함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순수함은 자기애와 재물, 개인적인 성공이나 자신의 의견에 대한 온갖 무질서한 집착에서 벗어난 영혼의 내적 자유를 뜻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마음이 맑게 열려 있고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판단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시야가 흐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마음의 자유를 위해 정결과 청빈의 덕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두 덕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은 널리 공유되는 영적 경험입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나중에 『길』에 수록하신 1932년의 메모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 제 마음을 뒤덮고 있는, 썩어 가는 관능의 더러운 껍질을 벗겨 주십시오”[33]. 청빈에 대해서도 이렇게 쓰셨습니다. “그대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얻으려고 쏟는 것과 같은 노력을 재물을 멀리하는 데 쏟으십시오”[34]. 이는 결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업신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그것들에 무질서하게 매달리면 쉽게 자유를 잃을 수 있음을 알고, 순진한 생각 없이 사물을 바라보라는 부르심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관상하는 사람이 되려면, 개인 성찰을 할 때 이 영역들을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어려움이 크다면 그에 걸맞은 큰 대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18. 무질서한 애착에서 우리 마음을 정화하도록 돕는 것은 내적·외적 극기와 참회입니다. 그렇기에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극기를 “지상의 것들을 다스리는 힘”[35]을 얻는 길로 자주 여기셨습니다. 곧 참으로 자유로워지고 자기 자신을 다스려, 그분께서 생생한 표현으로 “감각의 기도”[36]라고 부르신 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이웃에게 기민하게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화하고 관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이 참회의 길에서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이 사랑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극기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37].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기

19. 관상 생활은 그리스도인을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세계에 가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관상은 마음을 넓히고 형제자매들을 향해 눈을 열어 줍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 안에서도 그분의 모습과 현존을 발견하는 법을 배웁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할 수 없다고 일깨워 주십니다. 가까운 이들에게 베푸는 애정, 동료를 이해하는 마음, 어려운 이들을 향한 사랑, 친구들과 나누는 진실한 우정,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변모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합니다[38].

우리의 관상은 우리가 실천하는 형제애의 깊이에서 입증됩니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의 세심한 배려, 그들의 자유에 대한 존중, 기꺼이 봉사하는 정신, 경청하는 능력은 진실한 기도 생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마태 25,40 참조).

사랑받는 자녀로서

20. 우리 정신의 토대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쁜 자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바로 이 자녀됨에서 참된 인간적·그리스도교적 형제애가 생겨납니다. 우리가 같은 아버지의 자녀임을 알기에, 다른 이들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바라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며 각자의 존엄성을 이해합니다. 구체적으로, 모든 영혼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생각하면 진실한 애정을 품게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모든 피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겉모습이나 다른 이들의 결점으로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게 하고, 행동과 진실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이끕니다.

구속의 신비를 관상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이 선택적이거나 조건부일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은 편견과 기질이나 사고방식의 차이를 넘어, 언제나 일치시키는 것을 찾고 친교의 다리를 놓도록 요구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이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일상의 공동생활에서, 관상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인내와 이해와 용서 안에서 특별히 빛납니다.

21. 하느님께 용서받았음을 아는 사람은 원한이나 앙심을 품고 있을 수 없습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체험과 깊은 기도 생활에서 우러나온, 용서에 관한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저는 용서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39]. 이해하는 마음, 곧 참된 사랑은 언제나 남의 잘못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자기가 받은 해를 마음에 쌓아 두지 않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참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일입니다. 다른 이의 처지에 서서, 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세심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약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지닌 힘이 가장 드높게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크고 작은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비춥니다. 분열과 갈등으로 찢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평화와 기쁨의 씨를 뿌리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믿음의 빛과 사랑의 힘으로 증오의 어둠을 몰아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영혼들을 향한 갈망으로

22. “성덕은 참된 것일 때 잔을 넘쳐흘러, 그 풍성함으로 다른 마음들과 다른 영혼들을 채웁니다”[40]. 그렇기에 세상 한가운데에서의 관상은 자연스럽게 뜨거운 사도적 열정을 낳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면서, 그 사랑을 모든 이와 나누려는 뜨거운 열망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관상하는 영혼은 사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시대의 어려움이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회가 때때로 가로놓는 장애물들을 한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상황에서 복음의 빛을 전할 기회를 발견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희망이 담겨 있으며,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들을 향한 깊은 연민이 담겨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들이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마태 21,31 참조).

23.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관상과 사도직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내적 생활은 빵과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자라나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직을 향한 열망은 내적 생활의 정확하고도 적절하며 필수적인 표현입니다”[41]. 이처럼 참된 기도 생활은 영적 안락함이라는 이기심 속에서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기도 생활은 타오르고 불붙여 사도직으로 이끄는 불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도직은 부수적인 일이나 여가 시간을 채우는 활동이 아닙니다. 자기 영혼을 가득 채운 진리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몇 해 전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는 사도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입니다!”라고 썼습니다[42].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관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관상은 다른 일들과 나란히, 이따금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존재하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살아가는 모든 경험과 느끼는 모든 것에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관상과 일, 형제애와 사도직은 하나의 그리스도인 삶을 이루는 여러 차원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면, 일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고, 형제자매들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며, 온 세상에 기쁘게 그분을 선포하게 됩니다.

* * *

24. 이 서한을 마치며, 일상생활에서 관상의 스승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나자렛의 집에서 가장 단순한 집안일을 하시는 가운데,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관상하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고,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기십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2,51 참조). 그분의 영혼에 새겨진 예수님에 대한 기억들은 언제나 그분과 함께하며, 아드님과 함께하신 삶의 여러 장면을 생각 속에서 되짚어 보게 하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로 그 기억들이 마리아께서 지상 생활 동안 끊임없이 바치신 ‘묵주기도’를 이루었습니다”[43].

우리의 어머니께 청합시다. 정신과 마음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한 채 설립 100주년을 향한 이 여정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합시다. 저마다의 나약함 속에서도 세상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실히 증언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며 나아갑시다.

온 마음을 다하여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아버지

페르난도

로마, 2026년 10월 16일

[1] 메시지, 2026. 3. 19.

[2]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대전”(Suma teológica), 제2부 제2편, 제180문, 제3항 참조.

[3] 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31항.

[4] “가톨릭 교회 교리서”, 2598–2616항 참조.

[5] 베네딕토 16세, 일반 알현, 2011. 11. 30.

[6]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14항.

[7] “하느님의 종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의 영웅적 덕행에 관한 교령”, 1990. 4. 9.

[8] “사랑의 담금질”, 1014항.

[9]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과의 대화”, 116항.

[10] “내적 기록”(Apuntes íntimos), 618항(1932. 2. 26.).

[11] 같은 책, 619항(1932. 2. 29.).

[12] “성 가브리엘 사업에 관한 지침”(Instrucción sobre la obra de san Gabriel), 22항, 주 28.

[13] 정확한 날짜는 1931년 10월 16일입니다(A. 바스케스 데 프라다,”오푸스데이 설립자”[El Fundador del Opus Dei], 제1권, 389쪽 참조). 여러 해 뒤 그 순간을 돌아보며 그분께서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제게서 비롯되지 않은 빛으로 그 놀라운 진리를 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진리는 제 영혼 안에서 타오르는 불씨처럼 남아, 결코 꺼지지 않았습니다”(“편지 15호”, 41항).

[14] 묵상, 1958. 11. 2.(A. 바스케스 데 프라다,”오푸스데이 설립자”, 제3권, 344쪽에서 재인용).

[15] 예를 들어 요한 15,4 이하; 1요한 2,6 이하; 4,12 이하 참조.

[16] 레오 14세, 연설, 2026. 6. 6.

[17] 베네딕토 16세, 일반 알현, 2011. 5. 11.

[18] “하느님의 친구들”, 247항.

[19] 강론, 2025. 6. 26.

[20] “하느님의 친구들”, 296항.

[21] “편지 6호”, 15항.

[22]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과의 대화”, 114항.

[23] “하느님의 친구들”, 239항.

[24] 같은 책, 296항과 307항.

[25] 같은 책, 252항.

[26]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85편 강해”, 6.

[27] “하느님의 친구들”, 39항.

[28] 예수의 성녀 데레사,”완덕의 길”(Camino de Perfección), 제17장, 2.

[29] “하느님의 친구들”, 127항.

[30]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97항.

[31] 레오 14세,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 146항.

[32] “주님과의 대화”(En diálogo con el Señor), 48항.

[33] “길”, 130항.

[34] 같은 책, 633항.

[35]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37항.

[36] 같은 책, 9항.

[37] 같은 책, 37항.

[38] 같은 책, 166항 참조.

[39] “밭고랑”, 804항.

[40] “사랑의 담금질”, 856항.

[41]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122항.

[42] 사목 서한, 2017. 2. 14., 9항.

[43] 성 요한 바오로 2세,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11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