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로 델 포르티요 주교의 시성식 조사 시작

알바로 델 뽀르띠요 (1914- 1994) 는 도로 공학사, 철학 박사 그리고 교회법 박사위를 가지고 있었다. 1935년 7월 7일 부터 수년후 몸소 지도할 오푸스데이에 소속하였다. 이다음은 마드리드의 "라 라손 (La Razón)" 신문에 편집된 내용이다.

알바로 델 폴틸료 주교

델 뽀르띠요 주교께서는 주님을 위한 봉사에 쉬지 않고 노고 하셨고 교회에 평신도들의 역할을 중요시 함에 기여 하였다. 그의 성적인 삶, 사목 경험, 깊은 인간미때문에 올 3월 5일 시성식 조사가 시작 되는것이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후계자였던 알바로 델 뽀르띠요 몬시뇰의 시성식 조사가 올 3월 5일 시작된다. 오푸스데이의 단장주교였던 그는 창설자의 죽음후에 부터 이 회를서 다스림에서, 열렬한 주님을 위한 봉사, 교회안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을 강화함에 기여하였다. 시성식 조사 개막식은 교황대리 대주교구의 법정인 라테라노 관저에서, 루이니 추기경의 주재로 있게 된다.

수많은 이들은 델 뽀르띠요 주교를 "동 알바로"라고 부르며 세계 모든곳에서 부터 그의 중재를 찾는다. 그는 성 호세마리아를 처음 맞났을때 공학사 학생이었다. 1935년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오푸스데이에 가입하였다. 1944년 사제 서품을 받은후 성 호세마리아의 가까운 협력자였고 1975년부터 회를 지도하게 된다. 1946년부터 있었던 로마에서는 특별히 제 2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함에 많은이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교회안에서의 평신도들의 역할을 중요시 여겨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모든 인간들의 현실에 가져가야 합니다. 가족, 직업, 사회생활을 인간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로 만드러야 합니다".

공의회에서 사제들의 성직과 삶에대한 «Presbyterorum Ordinis» 의 편집 작업의 서기를 맡았었다. 1991년 1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3년후 성지를 방문해 돌아온후 숨을 거두었다. 교황께서 직접 델 뽀르띠요 유해앞에서 기도하려 방문도 했었다.

교황청의 시성 상임 위원회는 시성 조사의 첫 단계, 즉 그의 삶, 덕과 성성의 알려짐을 교구안에서 조사하게 제정 하였다. 이 조사에는 로마 대리 대주교구의 법정과 오푸스데이 자치단 법정이 함께 참여하게 된다.

자치단의 법정의 조사 개막은 3월 20일에 있게 된다. 이 두 법정은 조사에서 소송 (즉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서류를 모음) 할때 같은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만 조사의 마지막 재판은 교황청의 법정만의 자격이다.

알바로 델 뽀르띠요를 포함하여 시성조사가 시작된 오푸스데이의 회원 신자들은 7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