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 몬시뇰의 1월 9일 사목교서

"저는 지금 여러분과 함께 누구보다 자유를 사랑하며 살아가셨던 호세마리아 성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하느님께서 주신 이 위대한 선물의 몇 가지 측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유의 대한 1월 9일에 전달하는 단장 몬시뇰의 사목서간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예수님께서 저를 위하여 자녀들을 잘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1. 지난 몇 달간 저는 총 의회의 지침에 따라 자유에 관한 주제를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저는 지금 여러분과 함께 누구보다 자유를 사랑하셨던 호세마리아 성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하느님께서 주신 이 위대한 선물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인께서는 “나의 자녀들이여, 나는 이 점을 강조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이들을 이해하는 마음은 우리 오푸스데이 정신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1]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분의 말씀을 되새기고 묵상하며 우리 모두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 각 개인의 삶 속에서, 하느님 은총으로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영혼들이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를 누리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이 확대되고, 개인과 대중이 자유를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현실은
이 시대의 긍정적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며, 주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두가 자유를 잘 활용하여 완전한 자기실현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자유가 없으면 우리는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자유 그 자체가 달성되어야 할 최상의 목표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종종 무절제한 자유 추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실제 인간을 노예상태로 빠뜨리는 거짓 자유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자유는 즉시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날 때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벗어나서 스스로 걸어갈 때, 실제 그들은 의지할 곳 없이 정처 없는 고아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순례자가 아닌 방랑자가 되어 정처없이 떠돌고 그 어디에도 이르지 못합니다.”[2]

자유로 부르심 받은 우리들

2. 우리는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3). 창조 자체가 바로 거룩한 자유의 표현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에 참여하게 하셨으며(창세 1,31 참조), 특히 인간을 당신과 같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전합니다(창세 1,26-29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유로이 선을 선택하고 사랑하게 하셨으며, 또한 사랑으로 당신께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 한계를 지닌 우리는 스스로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지혜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당신과 닮은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께서는(창세 1, 26-29 참조) 인간의 자유때문에 초래될 크나큰 ‘위험’ 또한 감수하고자 하셨습니다.”[3]

사실 이러한 위험은 역사의 시작부터 인간이 원죄를 범하여 하느님 사랑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는 선을 향하는 힘을 잃게 되었고, 우리의 의지는 어느정도 죄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본죄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는 더욱더 약화되었습니다.죄의 크고 작은 정도는 다를지라도 죄는 언제나 인간을 노예상태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로마 6, 17; 20).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유로운 존재입니다.”[4] 비록 “우리의 자유는 항상 나약함을 지니고 있지만”[5],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 내재된 본질적인 선으로 반드시 보호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가장 먼저 사랑하고 존중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6]

3.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은총은 우리를 새롭고 더 높은 차원의 자유로 인도합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심으로써”(갈라 5,1) 얻어 주신 자유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효력을 지닌 말씀과 활동을 통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유에 대한 찬미는 가톨릭 신앙의 모든 신비들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7]저는 우리 생활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한다고 여러분에게 거듭 말했습니다. 가장 깊은 의미의 자유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묵상기도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을 지니신 몸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자유를 발견하고 놀라워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십자가 희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온 생애동안 펼쳐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 17-18). 인류 역사상 주님의 십자가 희생처럼 자유로운 행위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사랑에서 오는 완전한 자유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8]

요한 복음서는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과 나누셨던 대화를 회고합니다. “Veritas liberabit vos”(요한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이로써 자유에 길이 열리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자유에 대한 의미가 부여됩니다. 하느님과 피조물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깨달으며 기쁨과 확신 속에서 제 이야기를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손에서 나왔고, 거룩하신 성삼위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굽어보시고, 이처럼 놀랍게도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저는 주님께 간청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마음 안에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날마다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9]

4.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의 자유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더욱 완전하게 됩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가장 심오한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10] 그런 사람은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불안과 갈등에 시달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해줍니까? 우리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참모습과 함께 참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이 해방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1요한 4, 16 참조) 그분께 사랑으로 응답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1요한 4,10 참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 존재의 기원이고, 매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십니다.[1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통해 그들의 삶 안에서 현존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받은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우리는 너무나 큰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가장 참된 표현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완성하고 새롭게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자유의 기원과 방향을 찾게 해줍니다. “자유는 오직 진리에 봉사할 때, 또 온갖 유형의 노예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추구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12]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를 크나큰 내적인 자유와 깊은 환희로, 침착하고 희망에 찬 낙관주의로 이끕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희망 속에 기뻐할’(로마 12,12)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의 손으로 선하게 창조된 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선행을 행할 수 있으며, 죄를 극복하고 세상을 하느님께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모님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죄에서 해방되는 것 이상임을 우리는 배웁니다. 그 자유는 우리가 삶안에서 현실을 새롭고 영적인 빛으로 보게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13]

영적 자유

5. 어떠한 형태의 강요도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니고 있는 고귀함에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단순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근원적 선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자유,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자유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14]

그러므로 여러분과 잠시 영적자유의 중요성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람들이 종종 이 단어와 연결 짓는 모호한 의미, 곧 어떠한 법에도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의 변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모든 사람의 자유는 자연적 의무와 사회적 의무에 – 가정과 직장에서의 의무, 시민으로서 의무 등 – 어느정도 실질적인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Dilige et quod vis fac. 여러분이 뜻하는 바를 사랑으로 행하십시오.”[15]참된 영적자유는 이처럼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이고 습관입니다. 특별히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의 이 질문에 자유롭고 적극적이며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봉헌생활을 대립시키는 것은 지극히 나쁜 일입니다. 자아포기는 자유의 결과입니다. 보십시오. 자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는 하나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녀가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녀의 자유는 더 위대할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이 위대하다면, 그녀의 자유는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자아포기를 전제로 한 그녀의 복된 자유때문에, 또한 그녀가 자유로이 선택한 자아포기 덕분에 그녀의 자녀는 선한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16]

여기서 우리는 왜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의무를 줄인다는 의미가 아닌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워질수록 더 많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결국 사랑이 커지는 것은 자유가 커지는 것,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Quanto aliquis plus habet de caritate, plus habet de libertate.” [17] 우리의 사랑이 강렬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하기 싫거나 특별히 어려운 일을 할 때조차, 그 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함으로써 영적자유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우리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입니다.”[18]

6. 명랑함 또한 영적자유의 표현입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나는 여러분에게 자유에 대한 사랑과 유머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습니다”[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상당히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기쁨과 유머로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기쁨의 주인이요, 그것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성령 안에서 이러한 기쁨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참된 자유를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쁨 없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신의 슬픔 속에 빠져버리고 맙니다.”[20]

이 기쁨은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그러므로 우리는 하기 싫은 의무도 기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는 일만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21]어렵고 불쾌한 일들도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사랑으로 자유롭게 수행한다면 말입니다. 1963년 4월 28일,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묵상지도 중에 수년 전, 1931년에 하느님께서 주신 빛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주님,주님께서는 저에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행복과 기쁨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 지금 저는 그것을 어느 때보다 분명히 이해합니다 –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2]

7.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우리 각자를 위해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모든 것들은 자유를 제약하는 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완전한 자유의 법(lex perfecta libertatis)입니다 (야고 1,25 참조).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단순히 우리에게 사랑의 의무를 부과하는 외적 규율만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내적 은총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Pondus meum amor meus” 나의 사랑이 나의 멍에입니다.[23]이것은 사랑하기가 때로 힘들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 외에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이 바로 우리가 가는 모든 장소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Eo feror, quocumque feror”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이끄는 것은 사랑입니다.[24] 나를 모든 곳으로 이끄는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우리도 각자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다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자유와 봉헌생활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서로를 지탱해 줍니다. 오직 사랑때문에 자유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자유를 포기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봉헌생활을 할 때마다, 자유는 그들의 사랑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렇게 거듭난다는 것은 언제나 젊음과 관대함, 높은 이상을 가지고 위대한 희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25]그러므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은 자유로운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 32-34). 예수님께는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곧 당신의 양식이요 힘입니다.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의 인성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그분의 삶과 운명에 동참하는 것, 아버지의 뜻에 자유롭고 사랑으로 가득 찬 순종에 함께하는 것을 뜻합니다.”[26]

베네딕토16세 교황님께서는 이처럼 자유와 봉헌의 밀접한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향한 순종 안에서, 사랑에 찬 의식적인 결정을 통해 당신의 자유를 성취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자신보다 더 자유로우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의적인 권력이나 지배를 위하여 당신의 자유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섬김의 삶을 통해 당신의 자유를 실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유를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없는 자유는 단지 무엇인가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공허한 가능성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자유 역시 사랑에서 의미를 얻습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과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 희생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놓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모순된 표현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당신의 가장 찬란한 자유를 실현하셨습니다. 갈바리아에서 유다인들이 주님께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고 소리칠 때, 주님께서는 바로 그 형틀 위에 끝까지 계시며 아버지의 자비로운 뜻을 실행함으로써 당신의 자유를 보여주셨습니다.”[2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셨습니다”(예레 20,7). 예레미아 예언자의 기도에서 우리는 참으로 폭넓은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 가운데서 우리의 성소를 단순한 의무가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는 태도는 영적자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받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해 줍니까!

8. 영적자유는 또한 실재하지 않는 의무로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수많은 작은 계획들을 자유로운 결단으로 유연하게 바꾸거나 미룰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20년 전 하비에르 단장주교님께서 한 편지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자유롭게 책임감을 가지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최상의 계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매 순간 자유롭게 선택하고 동시에 순종합니다.”[28]

오푸스데이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걱정이나 이해되지 않는 점, 개선하고 싶은 점이 있을 때 적절한 사람과 상의할 수 있도록 자유와 신뢰의 분위기를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침착함과 유머로 인간적인 한계나 우리를 괴롭히는 상황 등을 충실하게 인내로서 받아들일 때, 이러한 신뢰의 분위기는 더욱 자라납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들어도 일치나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견해보다 더 중요하고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선을 위하여, 희생과 자유를 발휘하는 것은 훌륭한 자녀의 태도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갈라서게 하거나, 친교를 해치거나, 형제들과 일치를 깨뜨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표징입니다.”[29]

9. 때로 고통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예수님과 더욱 깊이 일치시키기 위해 이것을 활용하십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히브 5,8),이로써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9).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적인 한계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영적자유의 또 다른 표현이며 원천입니다. 이와 반대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슬픈 태도를 떠올려 봅시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수많은 원한들을 불평하느라 가족의 행복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자유는 너무나 협소하고 이기적으로 변하여 사랑할 수도,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 31)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집에 살고 있었지만 자유롭지 못했고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그의 자유와 희생은 가정에 대한 깊은 유대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족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설득하는 시어머니에게 그가 이렇게 대답하는 장면은 감동적입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렵니다” (룻 1, 16-17).

성모님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행동 안에서 어떻게 자유가 드러나는지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획을 알리는 신묘한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어머니께서는 경청하시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려고 한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고 확고하게 ‘피아트(Fiat)!’, 곧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하고 응답하십니다.”[30]

자유를 존중하는 교육과 사목 활동

10. 우리의 교육에서 영적지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새처럼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서간에서 형제적 대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영혼들 안에 위대한 자유의 정신을 심어 주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자주 이야기한 점을 상기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내가 원하기 때문에’야 말로 모든 이유 중에서 가장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영혼들이 하느님의 뜻을 스스로 완수하기를 원하도록, 완수하고 싶은 느낌이 들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명령하지 말고 조언하십시오.”[32] 영적지도에서 하는 조언의 목적은 각 개인의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의 활동을 보조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와 책임감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기며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영혼도 ‘단순 반복’으로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과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식대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33]

우리는 때로 영혼들에게 사랑과 자유로운 믿음의 생활이 언제나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충고와 애정 어린 격려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영적지도에서는 또한 상대방이 수행해야 할 의무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분명하고 절제된 사랑이 담긴 “권고적인 충고”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충고의 힘은 충고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의무라는 중요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서로 신뢰하는 관계라면 이러한 말을 해줄 수 있으며 또 해주어야 합니다. 충고를 받는 사람 역시 이것이 형이나 누나가 해주는 충고처럼 애정과 용기에서 나오는 것임을 느끼고 고마워할 것입니다.

11. 우리가 일생동안 받는 교육은 때로 필수적인 요구사항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반대로 그저 남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결국 잘 해내지 못한 일, 우리의 결점, 우리의 한계만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잊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세마리아 성인의 가르침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내적생활을 비롯한 모든 일에서 자유의 위대한 옹호자들입니다. 우리는 일정한 틀이나 방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 영성생활에서도 확고한 결심이 뒤따르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34] 그러므로 영적지도에서 솔직함은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열어줄 뿐 아니라 영성생활의 주도성을 길러 줍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기 위하여 내적으로 투쟁해야 할 점들을 지도자와 자유롭게 상의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신을 전달하는 한편, 획일성이 아닌 일치를 만들어 냅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이것을 인상적인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또는 왼쪽으로 갈 수도 있으며, 구불구불하게 갈 수도 있습니다. 걸어갈 수도 있고 말을 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길을 여행하는 방법은 수천 가지나 됩니다. 그 중에서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양심이 각 개인에게 처한 상황에 따라 알려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35]오푸스데이의 정신은 우리 삶의 방식에 멍에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같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 토양에서 자라날 씨앗입니다.

12. 우리의 교육에서는 안정이나 보호에 대한 지나친 열망으로 활동이 약해지거나 영혼을 제약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영혼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채처럼 활짝 펼쳐야 합니다.”[36]그러므로 우리는 실수나 실패, 적대적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자신의 영적형성에 힘써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확고하고 신중하게 우리의 사회적 직업적인 환경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의 구체적인 사도직의 과제에 부합하는 또는 사도직에서 보이는 열의와 자발성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사도직은 무엇보다 개인 사도직이라는”[37]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지도자들이 사도직 활동을 장려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한 번도 여러분을 속박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여러분이 아주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직에서 우리의 정신에 맞는 범위의 – 그 범위는 매우 넓습니다 – 창의성을 지녀야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장소, 환경, 시대적 상황에 꼭 맞는 활동을 찾아내야 합니다.”[38]

13. 자유에 대한 사랑의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평의회의 조력을 받아 단장과 지역장(Vicar)의 사목권을 행사하는 오푸스데이의 사목 형태에도 드러납니다. 호세마리아 성인의 이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묵상합시다. “자유의 정신에 따라 오푸스데이의 교육과 사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어떤 단체든 불신에 바탕을 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반대로 존중을 바탕으로 영혼들을 교육하고 사목한다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그들에게 참되고 거룩한 자유를 심어주고 자유를 스스로 잘 관리하도록 가르칩니다. 교육과 사목은 사랑입니다.”[39]

존중하는 마음으로 영혼들을 사목 한다는 것은 우선, 사목활동과 영적지도를 혼동하지 않고 개인의 양심적인 자유를 섬세하게 존중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존중은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규범을 단순히 적절한 권고나 충고 또는 제안으로 혼동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 하지만 중요함에 있어서는 마지막이 아닌 –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사목하고 언제나 관련된 사람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경청할 준비가 된 지도자들의 이러한 자세는 오푸스데이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아주 멋진 특징입니다.

또한 감사하게도 오푸스데이 안에서 회원들은 경제, 정치, 신학 등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의 영역이 아닌 모든 문제에 대해, 회원들은 완전한 자유와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논리적으로,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다원주의는 오푸스데이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좋은 정신적인 징표입니다.”[40] 종종 어떤 사람들은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이러한 다원주의는 사랑받고 오히려 장려되어야 합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양한 문제점들 안에서 다른 이들이 긍정적이고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면을 발견할 줄 압니다.

오푸스데이의 통치시스템을 이끌어가는 방식과 관련하여,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성의 필요성을 항상 강력하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푸스데이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자유로운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이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렸으며, 앞으로도 제가 평생동안 요구하는 이 점을 반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저는 오푸스데이의 통치시스템이 모든 수준에서 공동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독재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신중함의 표현입니다. 공동체성 안에서 문제들은 더 면밀하게 검토되고, 오류는 더 잘 수정되며, 이미 잘 진행되고 있는 사도직은 더 효과적으로 개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41]

공동체성은 기본적인 의사결정 방식과 체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것들이 주된 내용도 아닙니다. 공동체성은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다른 이들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데 도움되는 통찰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신념을 기초로 하는 정신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견해를 어려움 없이 표출할 수 있도록 자유를 존중하고, 나아가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증진시킵니다.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사도직 활동

14. 우리의 사도직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과 더욱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진실한 열망에서 비롯됩니다. “영혼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바오로 사도의 강렬한 외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Caritas mea cum omnibus vobis in Christo Iesu! (1 코린 16, 24)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은 모든 영혼의 자유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세상 속에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게 될 것입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존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해 얻어 내신 자유입니다(갈라 4, 31 참조).”[42]

우리는 말과 증거를 통해 행하는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 안에서,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데려가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를 무엇보다 사랑합니다. “우리의 사도직 활동에서도 – 특히 우리의 사도직 활동에서는 – 아주 사소한 형태의 강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그분께 봉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도직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43]

참된 우정은 서로의 자유와 친밀함을 보호해 주는 진실한 애정을 동반합니다. 사도직은 우정 위에 새롭게 덧대어지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예전에 다른 서간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사도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이기’ 때문입니다!”[44] 우정 그 자체가 바로 사도직입니다. 우정 그 자체가 빛을 주고받는 하나의 대화입니다. 우정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계획들은 새롭게 생겨납니다. 우정 안에서 우리는 좋은 것을 함께 기뻐하고 어려움 안에서 서로 도와줍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하는 시간을 즐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소 사도직(proselytism)은 원래 복음선포의 선교적 사명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단어였습니다.[45]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언제나 이 단어를 – 최근에 덧붙여진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 긍정적인 뜻으로 이해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단어들이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원래 의미와 다른 새로운 함축적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상황에 적합한 것인지 신중하게 고려하십시오. 왜냐하면 듣는 이들이 여러분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자유는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 가능한 경우 더욱 분명하게 – 오푸스데이 성소에 부르심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그것을 당사자에게 설명할 때 드러납니다. 여기서 자유란 그 사람이 원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자유, 무엇보다 성소를 스스로 식별하고 뒤따르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누리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끌어오라고(compelle intrare)’ 하신 복음서의 다소 강한 표현(루카 14, 23)을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정신의 아주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당신의 성소 사도직(proselytism)에서 사용해야 할 ‘끌어오는 힘(compelle intrare)’은 물리적인 강압이 아니라, 충만한 빛과 풍요로운 교리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기도와 직업생활 안에서 교리의 참된 증인이 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주는 영적인 자극과 여러분이 봉헌하는 모든 희생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 비록 여러분의 삶 안에서 시련이 결코 모자라지 않겠지만, 여러분을 침착한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부러워하게 될 사실 때문에 – 여러분의 입가에 띄는 미소입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태도와 매력을 더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끌어오는 힘’이 완성되었습니다.”[46]이제 분명하지 않습니까?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은 언제나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확신과 단순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가까이 사는 삶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전함으로써 확장되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16. Veritas liberabit vos (요한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나타난 해방의 약속들은 모두, 하느님과 인간에 관한 ‘진리’에 기반한 하나의 참된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이십니다 (요한 14, 6참조).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진리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분이시고, 사람의 영혼과 마음, 양심을 약하게 만드는 것 들로부터 뿌리째 뽑아내고, 잘라내고, 해방시키는 분이심을 봅니다.”[4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단지 지상에서만 누리는 일시적인 선물로 주시지 않고, 영원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는 사랑처럼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고”(1코린 13, 8) 천국에서 지속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향한 여정 (in libertatem gloriae filiorum Dei)입니다 (로마 8, 21). 천국에서 우리의 자유는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완전해질 것입니다. “엄청난 사랑이 천국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배신도 속임도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 아름다움과 위대함과 지식의 완성… 그것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넘치도록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그것을 더욱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48]우리에게 충실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사랑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그분의 가득한 애정을 담아 자녀들을 강복합니다.

페르난도

2018년 1월 9일, 로마에서 호세마리아 성인 탄생 축일에

[1] St. Josemaria, Letter, 31 May 1954, no. 22.

[2] Pope Francis, Apostolic Exhortation Evangelii gaudium, 24 November 2013, no. 170.

[3] St. Josemaria, Letter, 24 October 1965, no. 3.

[4] Benedict XVI, Encyclical Spes salvi, 30 November 2007, no. 24.

[5] Ibid.

[6] St. Josemaria, Christ is Passing By, no. 129.

[7] St. Josemaria, Friends of God, no. 25.

[8] St. Josemaria, The Way of the Cross, 10th Station.

[9] St. Josemaria, Friends of God, no. 26.

[10] Ibid.

[11] Cf. St. Augustine, Confessions, III, 6, 11.

[12] St. Josemaria, Friends of God, no. 27.

[13] Pope Francis, Homily, 15 August 2014.

[14] Benedict XVI, Encyclical Caritas in veritate, 29 June 2009, no. 68.

[15] St. Augustine, In Epist. Joan. ad Parthos, VII, 8.

[16] St. Josemaria, Friends of God, no. 30.

[17] St. Thomas, In III Sent., d. 29, q.un., a. 9, qla. 3 s.c. 1.

[18] St. Josemaria, Christ is Passing By, no. 17.

[19] St. Josemaria, Letter, 31 May 1954, no. 22.

[20] Pope Francis, Homily, 31 May 2013.

[21] St. Josemaria, Letter, 29 December 1947, no. 106.

[22] St. Josemaria, Notes from a meditation, 28 April 1963.

[23] St. Augustine, Confessions, XIII, 9, 10.

[24] Ibid.

[25] St. Josemaria, Friends of God, no. 31.

[26] St. John Paul II, Encyclical Veritatis splendor, 6 August 1993, no. 19.

[27] Benedict XVI, Angelus Address, 1 July 2007.

[28] Javier Echevarría, Pastoral letter, 14 February 1997, no. 15.

[29] St. Josemaria, Christ is Passing By, no. 17.

[30] St. Josemaria, Friends of God, no. 25.

[31] St. Josemaria, Letter, 14 September 1951, no. 38.

[32] St. Josemaria, Letter, 8 August 1956, no. 28.

[33] Ibid.

[34] St. Josemaria, Letter, 29 September 1957, no. 70.

[35] St. Josemaria, Letter, 2 February 1945, no. 19.

[36] St. Josemaria, Furrow, no. 193.

[37] St. Josemaria, Letter, 2 October 1939, no. 10.

[38] St. Josemaria, Letter, 24 October 1942, no. 46.

[39] St. Josemaria, Letter, 6 May 1945, no. 39.

[40] St. Josemaria, Conversations, no. 98.

[41] St. Josemaria, Letter, 24 Decmeber 1951, no. 5.

[42] St. Josemaria, Letter, 16 July 1933, no. 3.

[43] St. Josemaria, Letter, 9 January 1932, no. 66.

[44] Pastoral letter, 14 February 2017, no. 9.

[45] Cf.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Doctrinal Note on Some Aspects of Evangelization, 3 December 2007, no. 12 and note 49.

[46] St. Josemaria, Letter, 24 October 1942, no. 9.

[47] St. John Paul II, Encyclical Redemptor hominis, 4 March 1979, no. 12.

[48] St. Josemaria, The Forge, no. 995.단장으로부터 2018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