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강론)

성 호세마리아의 미사 강론 "이 세상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는 1928년 부터 전도한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바라 대학교 캠퍼스에서  1967년 10월 8 일 미사중 강론

성령 강림절 다음 제 21주일에 해당하는 신성한 성서 말씀에 두 구절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을 제가 말하고자 하는 범위에 들어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교회 안에서의 하느님의 자녀들의 가족 앞에서 발음되는 한 사제의 말, 초자연적이고 하느님의 관대하심과 자비하심을 설교하고자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곳, 나바라 대학교 캠퍼스에서 집전되는 감명적인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받을 수 있게 준비를 하는 말씀이어야 되겠습니다.

지금 방금 한 말씀을 숙고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는 이 주님의 몸과 피의 성사 적인 희생, 모든 그리스도교의 신비들이 합치되는 믿음의 신비인 성체성사를 집전드리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런 까닭에, 이 일생 안에서 가장 성스럽고 초월적인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어떤 점으로는 이 땅과 이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눈물을 닦으실 곳, 옛 세상이 끝나 죽음도, 슬픔도, 고민의 외침도 없을 하느님의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시록 21:4)

하지만 이 의미적이고 위안이 되는 사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성체의 종말적인 뜻이 어쩌면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자들의 삶이 단지 영적인 존재 (유심론적인 존재) 뿐이라고 해서, 꼭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라고, 이 세상에 있는 나쁜 것 에 섞이지 않고 사는 청정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 오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볼 때, 성당이 그리스도교인 일생의 가장 우수한 장소가 되고, 그리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성당에 가서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 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면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꼭 천국의 대기실처럼 여겨지는 어떠한 교회제도에서 만들어진 사회에 삽입되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교회의 가르침과 은총의 삶은 인간의 역사와 결코 만나지 않고 나아간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10월의 아침 , 주님의 파스카 잔치를 거행하려 할 이 때에, 저희는 이 그릇된 그리스도교의 개념에게 반대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주께 감사드리는 이 미사성제의 정황에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가 지금은 한 특이한 성당에 있다고 할 수 가 있겠습니다. 본당 회중석은 이 캠퍼스이고 교회 바로 제단 뒤 장식은 이 대학교의 도서관이라고 지금 볼 수 도 있고, 저 멀리에는 새 건물들을 짓는 기계들이, 하늘에는 이곳 나바라의 푸른 하늘을...

지금 열거된 것들이 자연스럽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모습으로, 보통 삶이 진정으로 저희의 신앙 생활의 장소라는 것 의 확증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의 형제들이 있는 곳, 여러분들의 염원이 있는 곳, 여러분들의 일과 사랑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일상적인 그리스도 님과 만나는 곳입니다. 이세상의 가장 물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바로 저희가 하느님과 형제들을 섬기면서 성성 (聖性)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 적힌 대로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손에서 나왔기에,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창세 1:7) 야훼께서 보시고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나쁘고 추하게된 것은 우리 인간들의 저희의 죄와 배신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치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사시는 여러분들에게서는 공정한 일상 생활에서 도망가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여러분들은 지금 하느님께서 공민적인, 물질적인, 현세적인 작업에서, 또 그곳에서부터 여러분들을 부르심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과학 연구실에서, 병원 수술실에서, 군대에서, 대학 강좌에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농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모든 일들의 큰 파노라마에서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잘 깨달으십시오. 매일 매일의 아주 보통 적인 상황 속에는 여러분들이 발견해야할 어떠한 신적인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대에, 대학생과 노동자 청년들에게 영적 생활을 "물질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곤 했습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을 수 있는 유혹에서 보호하려 한 것이지요. 한쪽으로는 영적 생활, 하느님과의 관계가 있고 또 떨어진 다른 쪽으론 작은 세속적인 일들이 가득한 가정의 생활, 직업적, 사회생활을 사는 이중적인 삶을 살려하는 유혹입니다.

그리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이중적인 삶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교인이 되려한다면 이러한 정신 분열증 환자 같은 생활을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된 삶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육체와 영혼에서 일치된 삶이 성(聖)적이고 하느님이 가득 차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저희는 볼 수 있는 작고 물질적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희가 일상 생활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분을 발견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물질과 하찮게 보이는 상황에게 처음 있었던 고귀한 의미를 되찾아야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를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게 하고, 영적으로 만들고, 우리 예수그리스도와 꾸준히 만날 수 있는 기회와 방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교 적인 의미는, 유물론이라고 판단되는 위험을 가지고도 항상 성육신 (聖肉身)을 거부하는 관념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정당하게, 영적것인것에 닫힌 유물론에 반대되는 "크리스챤적인 유물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 저자들이 말했듯이 말씀의 발자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칠성사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저희를 성성(聖性)에 이르게 하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게 하는 길의 가장 명백한 표명이 아니겠습니까? 하나 하나의 성사들이 물질적인 방법으로 저희에게 주어지는 창조적이고 구원 적인 힘을 가진, 하느님의 사랑인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다가오는 성체 성사가, 최근의 공의 회가 상기했다시피, 초라한 이세상의 물질 (포도주와 빵)을 통하여, 인간들이 재배한 자연의 물체를 통하여 바쳐져, 숭앙받아야할 저희의 구원자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께서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것이고,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님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1고린도서 3,22) 라고 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에 계신 성령께서, 땅에서부터 주님의 영광까지로 솟아오르는 움직임을 일으키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움직임이 단조한 것들도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먹던지, 마시던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1고린도 10,31) 라고도 쓰여졌습니다.

이렇게 성서에 쓰여진 가르침이 오푸스 데이의 정신의 핵심입니다. 이 가르침을 따르신다면 여러분들이 완전한 정신으로 일터에서 생활하고, 매일 평소한 일들에서 하느님과 모든 이들을 사랑하며, 사소한일들에 숨어있는 성스러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가스띠쟈의 시인이 썼던 시구한마디가 이것에 잘 맞습니다: "천천히, 필기를 지키면서, 일을 잘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안토니오 마차도, 시집 161).

여러분, 한 신자가 매일의 가장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초월적임이 계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교인의 성소가 매일의 산문을 음절이 가득한 시구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망치를 두드리듯이 반복하여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일치가 되는 곳은 평상일 들을 성스러운 의향으로 할 때의 여러분들의 마음 안인 것입니다.

평소한 일들을 성스럽게 행한다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모든 과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틀린 꿈과 거짓의 이상주의나, 환상들, 제가 "만약 신비주의" 라고 이름지었던 행동, 즉 만약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다른 직업을 가졌었다면, 만약 내가 더 건강했다면, 젊었다면, 나이 들었다면, 이라는 모든 생각들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진지한 마음으로, 주님이 계시는 물질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만져보아라, 그리고 영혼은 이런 살과 뼈가 없다는 것을 보아라" (루가 24.39).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수 없이 많은 세상의 일들은 이 진리의 빛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활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당뿐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좋은 지식적인, 직업적인 준비를 얻으려 노력하며,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이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개인의 식견을 가지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개인이 숙고한 나머지 결정을 하게 되니, 삶의 작고 큰 일들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신자는 결코 자신이 교회를 대표해서 성당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믿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그 문제들의 "가톨릭의 결정"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성직권 주의이고 잘못된 "공식적인 가톨릭" 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름을 붙이건 좌우간, 사실의 본성에 왜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서 올바른 "평신도 정신"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 정신은 세 가지 결과에게 도착합니다: 각자의 책임을 가지고 행동할 정직함, 의견을 나타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신자 형제들을 존중할 수 있는 그리스도적 성격,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인간적인 깃발 안에 성교회를 섞지 않는 가톨릭 적인 생각.

이곳에서도 성교회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남녀 여러분들의 존엄성에 응하는 자유를 가지지 않는다면 결코 보통생활을 거룩하게 살려는 목적을 이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 자유는 그리스도교의 생활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자유는 책임을 가진 자유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위급한 때만이 아니라 매일 여러분들의 권리를 실행하셔야 된다는 초청으로 받아드리십시오. 또한 한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숭고한 자세로 지키십시오. 정치의, 경제의, 학계의, 직업의 삶 안에서 용기 있게, 자유를 가지고 한 결정의 결과를 받아드리고, 여러분들에게 해당하는 개인적 자립성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이 그리스도교 적인 "평신도 정신"은 과도(過度)나 광신(狂信)을 멀리 할 수 있게 합니다.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여러분들을 평화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고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차원에 있는 협력도 장려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수년 전부터 같은 말을 해 왔기에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 공민적 자유와 같이 삶과 서로 이해의 가르침은 오푸스데이가 전하는 메시지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사업에 봉사하려하는 남자와 여자가 간단히 말해 다른 시민들과 똑 같은 사람들이고 진지한 책임을 가지고 각자의 그리스도교인의 성소를 살려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언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제 영적 자녀들은 다른 시민들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반하여, 믿음을 제하고는 다른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같은 점이 없습니다. 저는 수도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수도원의 삶과, 사도직 사업과, 세상을 떠남을 존경하며 그들이 성교회의 거룩함의 다른 표지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께 받은 성소는 수도자의 성소가 아니고 그것을 제가 원한다면 틀린 것이 되겠습니다. 이 땅의 어떤 권위자도 저를 억지로 결혼하게 할 수 없듯이 한 권위자가 저를 수도자가 되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저는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교구 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 이 세상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제입니다.

이 죄인과 함께 예수님을 따른 이들은, 서품 전에 평신도 적인 일, 직업을 가졌던 사제들 몇 퍼센트와, 각자의 주교 님들에 대한 순종과 교구 사목에 대한 사랑과 효능을 키우는 세계의 수많은 교구 신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십자가에서부터 팔을 열고 모든 영혼들이 그들의 마음에 있도록 하고, 저와 함께 이 세상 안에서, 사랑으로 현세의 거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다수의 나라, 언어, 인종의 남자와 여자들, 각자의 직업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기혼자, 또 많은 미혼자들인 이들은 다른이들와 함께 이 세상을 더 인간적,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참여하고 있고, 각자의 책임으로서 숭고한 매일의 일들에 참가하여, 다른이들와 함께 한 사회 안의 권리를 행하고 의무를 지키며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꿈임 없이, 다른 어떤 신자들과 틀림이 없게, 엘리트 정신이 전혀 없이, 각자의 동료들과 함께 이 세상의 가장 천하고 보통 적인 일들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빛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푸스데이가 단체로서 장려하고 있는 일들도 이러한 현세적인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기 때문에 공적인 교회의 사업이 아닙니다. 성교회의 고계의 공적인 대표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적인 진흥으로서 시민들이 만든 문화에서, 사회에서의 사업이고, 그들은 이 일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훈훈하게 만들려 하는 것입니다. 한 자료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는, 예를 들어, 성령께서 세우신 주교 님들이 미래의 사제들을 준비시키는 교구 신학원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하여, 오푸스 데이는 노동인 들의 교육원, 농민들의 육성을 위한 단체들, 초등 학교, 중고등, 대학교, 그리고 세계의 많은 곳에서 다른 작업들을 장려하고 진척시키고 있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사도직 작업의 열의는 기슭이 없는 바다 같다고 제가 수년 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러분들의 참석이 긴 강연보다 더 설득력이 많기에 제가 이에 대해 더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나바라 대학교의 친구 여러분들이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약속하여 일하는 국민들의 한 부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애정의 격려와, 기도와 희생, 협조는 가톨릭 공식적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협력은 사회의 시민의 올바른 양심의 증언이고, 이세상의 공익을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으로 한 대학교가 국민들의 힘으로서, 국민들의 받힘으로써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한번 더 이 대학을 위해 주는 거대하고 굳센 나바라 안의 고귀한 이 도시, 빰쁠로나의 도움을 감사합니다. 대학교의 친구들 중에는 스페인의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고, 또 (감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외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도, 또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지만 이 사업의 정신과 의향을 이해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이 대학교가 사회의 자유의, 지성의 준비, 직업적의 겨룸, 대학 학계의 격려의 불티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관대한 희생이 이 세계적인 사업에 기초가 되고 이것이 인간적 학문, 사회의 진흥, 믿음의 교육의 향상이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린 이것을 나바라의 시민들이 이해하셨고, 또한 이 대학교가 이 지역에서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고, 특히 많은 이곳의 자녀들에게 다른 방법으로는 힘들거나 불가능했던 지식의 직업으로 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사회적으로 증진하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셨습니다. 이 대학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지를 이해함으로써 나바라가 처음부터 후원했고, 매일 커가고 더 열의적으로 되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공정한 기준이고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는 벌써 사실이 된 것이라, 스페인 국가에서 개인의 이익을 찾지 않고, 그 반대로 완전한 사회의 봉사를 위해 바쳐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번영을 위해 효능있게 하는 이 사업에 있는 짐을 덜어주도록 협력을 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지금 평상 생활에 따른 또 다른 차원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간의 순결한 사랑, 즉 애인들과 부부들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성스러운 인간적인 사랑은 어떤 틀린 유심론적으로 그저 다른 영적인 일들과 함께 허가되어, 관대되어지는 것 이 아닙니다. 40년 전부터 제가 말과 글로 전하려 했던 것, 그때는 이해하지 않았던 이들이 지금은 깨달고 있는 그것은, 바로 혼인과 가정으로 이끌어가는 사랑이 성소적인, 우리 하느님께 온전히 헌납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완전한 정신으로 일을 하십시오. 매일있는 작은 작업에 사랑을 넣으십시오, 그리고 사소한일에 숨어있는 성스러운 것을 찾으십시오. 이 가르침을 특별히 인간적인 사랑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들, 학생들, 이 나바라대학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이 아시듯이 제가 여러분의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 바쳤습니다. 이곳에 제가 애착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기도와 성모님께서 강복하실 당당하고 순결된 여러분들의 봉헌을 위해 캠퍼스 안에 지은 전당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1고린도 6,19). 얼마나 자주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성모님의 성상앞에서 이 물음에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하느님의 성모님, 그것을 저희가 알고 당신의 도움으로 살고 싶습니다. 매번 놀라울 이 사실을 생각 하실 때마다 여러분의 마음안에서 명상의 기도가 나올것입니다: 나의 몸처럼 물질적인 곳이 성령이 오실 장소로 만들어 졌다......., 이제 내가 나의 것만이 아니다......., 나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이 하느님것이다. 이 기도는 실행할수 있는,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결과를 만들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 내십시오" (1고린도 6,20).

또 한편으로, 인간적 사랑에대한 묵상을 깊히 이해하고 평가하는 이들중에서 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주님께 이 땅에서의 사랑의 중재없이, 오직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몸과 영혼을 봉헌하는 길, 하느님의 선물인 신성한 성소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마쳐야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하느님의 위대함과 자비하심에 대해 말씀드린다 했습니다. 평소 생활을 거룩하게 살라는 말씀을 했으니 이에 응했다 생각합니다. 현세의 삶 안에서 사는 거룩한 생활, 시끄럽지 않고, 소박하게, 진실하게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자비하심,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도 끊없이 주시는, 오늘의 하느님의 권능의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께 시편을 읽는 저의 기도와 찬미에 함께 하시라 말씀드립니다: "나와 함께 '야훼, 높으시도다' 노래부르자. 모두 소리 맞춰 그 이름을 기리자" (시편 34,3). 즉 믿음으로 삽시다, 여러분.

믿음의 방패, 구원의 철모, 영혼의 검(劍)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드립시다. 잠시 전에 읽었던 성 바오로께서 에페소인들에게 쓴 서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페소 6,11). 우리 신자들이 아주 필요한 믿음, 특별히 올해는 우리가 사랑하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선포하신 믿음의 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평소 생활의 거룩함을 찾을 기반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신비인 성체에게 가까이 가는 지금 살아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요약하고 실행하는 주님의 파스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잠시 후에 이 제단 위에서 우리의 구원의 사업이 갱신됨을 고백하기 위해, 믿음 신경을 음미하고 이 제단에서, 이 집회에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드시고, 또한 우리가 세계적인, 오직 하나이고, 성스럽고, 가톨릭적이고, 사도적이고, 로마의 성교회로, 한 가족으로 만들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이것들이 그저 의식과 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인간들에게 거룩하게 만든 일상 생활의 증언을 하며 세상에게 보여주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모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